우리는 서서 이동한다. '걷는다'고 부르는 행위다. 한쪽 발을 내밀어 바닥을 딛고, 다른 발을 던져 내려놓고, 다시 이전 발로 돌아오는 과정의 반복이다. 걷기는 추락에서 시작한다.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내려놓으면서 추락이 시작되고, 넘어질 뻔하다가도 새로운 추락으로 균형을 회복한다. 한 발을 내딛지 않으면, 다른 발을 떼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게 있다가는 넘어질 수도 있다. 걷기는 인간을 특징짓는 행동유형이다. 말과 생각만큼이나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구분 짓게 하는 유일한 특성이다. 그렇다면 걷기와 말하기, 그리고 생각하기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로제 폴 드루아는 철학자의 걸음에서 사유와 이성을 발견한다. 걸음을 '나아가기' 또는 '벗어나기'로 보고 걷기와 철학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저는 걷기가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점에 근거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가 걷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 책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은 생각의 단초를 걸음걸이에 두고, 동서고금의 사상가 27명의 철학을 살핀다. 철학자의 걸음이 숨긴 그들의 내면세계를 파고들어가 걷기와 사유 메커니즘의 유사성, 연관성을 확인한다. 결국, 걷기는 그 자체가 인간의 '생각 근육'을 키우는 행위다.
철학은 걷기처럼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사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한다. 명백한 사실, 신념을 자극한 사람들이 철학자였다. 생각의 거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걸었다. 이들의 걷기는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배회가 아니다.
'국가론'을 읽지 않아도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선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데아계와 현상계를 대비했다. 꼼짝없이 묶여 벽을 보는 죄수는 자신의 그림자를 실재로 여긴다. 지각하는 그대로가 실재가 아님을 알려면 동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진짜 사물과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태양빛을 보는 순간 감각의 허상을 깨닫게 된다. 허상에서 벗어나려면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해야 하고, 어둠에 갇혀 있는 다른 죄수를 무지에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다시 어둠으로 들어가야 한다. 무지에서 앎, 다시 앎에서 무지로 가는 과정은 불완전의 세계를 바꾸는 과정이다. 즉 플라톤의 걷기는 실재를 알고 이데아로 나아가는 걸음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공자의 사상은 인(仁)으로 대표된다. 사회질서가 안정되려면 도덕성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그는 하늘을 절대적 존재, 본보기로 인식하면서도 인간과의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조정된다고 봤다. 저자에 따르면 공자에게 있어 인(仁)은 적당한 거리를 지키기 위해 조정되는 유연한 움직임이다.
노자는 걷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걷게 한다. 그의 '무위'(無爲)는 가만히 내버려두는 데서 출발한다. 이 때문에 노자에게서는 자연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전진하는 걸음이라는 역설이 만들어진다.
모든 것을 의심하던 방법론적 회의론자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사실, 즉 '의심하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렇게 데카르트 철학의 제1원리가 된다. 저자는 방법(method)이 '길'과 관계가 있다며 데카르트 사유 원리를 파헤친다. 그리스어로 'odos'는 '길, 여정'이다. 그래서 방법론은 '도정'(道程)이며 '길 위로 이동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정확하게 연결되는 한걸음, 한걸음이 추론의 고리를 형성한다고 한다.
칸트는 시간을 잘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오전 4시 45분에 일어나 5시에 차 두 잔을 마시고, 파이프 담배 두 모금을 피웠다. 7시부터 9시까지 강의하고, 9시부터 식사 전까지는 책을 썼다. 오후 7시 정각에는 부르주아가 사는 구시가지, 서민의 고함이 울리는 부둣가, 도시를 벗어난 자연을 매일 산책했다. 매일 두 발로 모든 사회를 지나친 그의 일상은 고장 나지 않는 시계와 같았다. 그런 그가 단 한 번 지각했다. 프랑스 혁명 발발 소식을 듣고 신문을 사러 갔던 날이다. 저자는 그의 걷기 시계에 일어난 작동이상이 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줬다고 말한다. 프랑스 혁명이 윤리적 원칙을 법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인간이 도덕적 관점에서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밖에 저자는 움직이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변증법을 이야기했던 헤겔조차도 걸음을 고민했다고 말한다. 헤겔이 서재에서 도출한 변증법이 자율적 걸음이자 인간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 내적 균열이라는, 다소 억지 같은 저자의 주장은 '머리로 걸었다'고 한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유물론과 다시 연결된다. 머리가 아닌, '다리로 걷는' 것이 물질세계를 변화시키는 방식이며, 구체적인 삶에서 출발해 필요한 강제의 노동에서 벗어나는 걷기가 '진짜 걷기'라고 말한다.
이동, 산책, 여행, 등산…. 걸음을 내포한 행위는 수없이 많다. 수많은 걸음걸이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생각이다. 어쩌면 증명을 요하지 않는 진리와도 같다. 걷기가 그렇듯 사유도 철학자만의 것이 아니다. 모색의 여정이 인류의 발전을 이끌었다. 걷고, 뛰고, 타고 오르고, 춤추는 모든 발자국이 세계와 호흡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걷다 보면 또 다른 사유 원리, 새로운 명제가 생길 것 같다.
"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 220쪽, 1만4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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