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가을의 끝자락에 섰다. 길가를 뒹구는 낙엽, 스산한 바람 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한다. 감미로운 음악 한 곡이라도 들으면 외로운 마음을 달랠 수 있을 듯하다. 보통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싶으면 음악카페를 주로 찾는다. 최근 대구에 음악을 들려주는 이색 식당이 속속 생겨나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소가 넓어지고 있다. DJ 박스를 꾸민 식당이 있는가 하면 손님 신청곡을 받아 추억의 LP 음반을 틀어주는 식당도 있다. 불판에 지글거리는 고기와 톡 쏘는 소주 한잔에 음악을 안주로 버무리는 것도 멋있다. DJ 박스를 만들어 신청곡을 선사하는 이색식당을 찾아 음악 여행을 떠나보자.
◆"손님들 애틋한 사연마다 가슴 뭉클"
요즘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는 대구 중구 종로골목 고기식당 종로1번지(사장 최병헌). "4년 전 농땡이로 만난 제자가 이제 군에 간다네요. 대구에서 술 사달라고 해 내려왔어요. 우울한 제자 마음을 음악으로 달래주고 싶네요." 스승과 제자가 한 테이블에 앉아 고기와 술을 마시며 스승이 제자의 사연을 신청한다. 사연은 DJ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 식당 구석구석 손님 마음속에 파고든다. 신청곡은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식당 손님들의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진다. "카~" 이 테이블, 저 테이블에서 소주를 들이켰다. "어쩌겠나. 내 군생활도 생각나구먼." 또 다른 테이블에서 연인끼리 술을 마시면서 남자가 사연을 보냈다. "지금 내 앞의 그녀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위한 나의 사랑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신청곡으론 조지 벤슨의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가 고기 냄새를 타고 퍼진다. 음악이 끝나자 손님들이 손뼉을 친다. 또 다른 손님은 "엄마가 좋아합니다. 언짢은 일이 있으신데 기분 푸셨으면…." 하고 사연과 함께 포지션의 'I love You'를 신청한다.
◆"DJ 박스, 우리나라 고깃집서 최초"
종로1번지의 DJ 박스는 지난 6월 문을 열었다. 콘솔, 턴테이블, 앰프 등 음향기기를 갖추고 있다. 식당에 스피커 8대를 설치했다. 음악은 온라인 스트리밍 음원 서비스로 들려준다. 7080 가요에서부터 올드팝, 뮤지컬, 영화음악, OST 등 거의 모든 노래가 가능하다. DJ 3명이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매일 사연과 신청곡을 들려준다. 식당 밖 스피커에서도 신청곡이 흘러나와 종로거리를 거니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즐겁게 해준다.
최 사장은 "고깃집 DJ 박스는 아마 전국에서 처음일 것이다"라며 "젊은 시절 음악을 좋아했던 옛날 아련한 추억을 다시 전할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DJ 박스를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고깃집에서 무슨 음악을 한다고."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했지만 의외로 손님들의 반응은 좋았다. 지글거리는 고기와 술에 음악이 적당히 버무려지면 손님들도 옛 향수에 쉽게 젖어든다. 최 사장은 "음악은 고상하거나 천한 게 아니라 항상 우리 곁에 있다"며 "음악은 어떤 자리를 불문하고 마음 편하게 듣는 게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또 최 사장은 "음악은 향수를 자극하는 마력이 있다. 남의 사연이 나의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DJ 역할은 지친 영혼 정화해주는 필터"
종로1번지에는 DJ 3명이 있다. 방송인 이재선(41'TBC 리얼인터뷰통 진행), 방송인 예나(32'TBC 굿데이 프라이데이 진행), 연극배우 이소진(35) 씨다. 모두 최 사장의 친구 소개로 인연을 맺었다. "숯불에 갈비가 촉촉하게 익고 내 마음은 음악에 익어가요. 갈비도 뒤집어주고 내 마음도 뒤집어주세요." DJ 이재선 씨는 옛 고교 추억이 묻어나는 교련복 복장에 모자를 쓰고 구수한 입담으로 손님을 사로잡는다. "고기도 주문하고 신청곡도 주문하세요." 예나 씨는 미모의 비주얼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센스가 넘친다. "토요일은 밤이 좋아요." 소진 씨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님 마음을 끈다. "고깃집에서 DJ를 모집한다고 해서 처음엔 망설였어요. 하지만 막상 진행해보니 손님들이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금'토요일 손님이 많을 땐 신청곡이 50곡쯤 된다. '바램' '가을 사랑' '비처럼 음악처럼' '사랑은 창 밖에 빗물 같아요' 등 대중적 인기곡이 사랑을 받고 있다, 간혹 손님들이 신청곡을 틀어줘 감사하다며 고기쌈과 술을 DJ에게 주기도 한다. DJ들은 "부부 싸움을 하고 들어온 손님이 음악 때문에 화해해 기분 좋게 돌아간 경우도 있다"며 "시민들의 각박한 일상에 조금이라도 영혼을 정화해주는 필터 같은 역할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053)252-5858.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