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 파워 인터뷰] 이재훈 (재)경북테크노파크 원장

"지방 경제 살리는 버팀목…해외서 월 2회 이상 벤치마킹 방문"

이재훈 원장이 경북테크노파크 본관 1층 로비에서 \
이재훈 원장이 경북테크노파크 본관 1층 로비에서 \'한국테크노파크 20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원장은 영남대 교수(경영학과)로서 테크노파크 기획팀 멤버에 이어 초대 기획부장, 부단장, 사업단장, 원장(연임), 한국테크노파크협의회 회장(연임) 등을 잇따라 거치면서 40, 50대를 테크노파크와 함께 보냈다. 박노익 기자 noik@msnet.co.kr

"지난 20여 년간 중앙정부는 위축된 지방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다양한 지역진흥사업을 실시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테크노파크 사업은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대부분의 지역진흥사업이 중앙정부의 TOP-DOWN(상의하달식) 방식으로 진행된 반면, 테크노파크 사업은 지역을 중심으로 한 'BOTTOM-UP'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 덕분에 지역이 필요로 한 장소에 인프라와 서비스를 갖출 수 있었고, 특히 스타트업(초기벤처)에 대한 인큐베이팅 기능을 보유한 것이 성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재훈(59) (재)경북테크노파크 원장은 "테크노파크 사업은 우리나라가 새로운 경제발전 전략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1990년대 중반부터 기획해온 사업으로, IMF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중반까지는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수출 대기업을 집중 육성함으로써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졌다면, 1970년대 중반부터는 과학기술 역량을 키우기 위해 대덕과학기술단지를 조성하고 특성화대학사업(경북대 전자공학과, 부산대 기계과 등)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경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국가균형발전과 중소'벤처기업의 육성이 더욱 절실해졌죠. 그래서 테크노파크가 기획되었고, 그 와중에 IMF 외환위기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 원장은 "1997년 12월 6개의 시범 테크노파크로 출발한 이후, 현재 전국적으로 18개의 테크노파크가 운영되고 있으며 8조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면서 "경북테크노파크만 해도 매달 2회 이상 해외에서 벤치마킹을 올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로서 처음 테크노파크 기획에 참여한 뒤, 경북테크노파크 기획부장'부단장'사업단장'원장(연임), 한국테크노파크협의회 회장(연임) 등을 맡으면서 '한국테크노파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이재훈 원장을 만나 그의 삶과 테크노파크 사업에 대해 들어보았다.

◆열등감 속에 보낸 청소년기

이 원장은 1959년 1월 1일 안동 도산면에서 2남 2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족의 생계는 오로지 어머니의 몫으로 남겨졌다.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살아가던 이 원장 가족은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때 대구로 나왔다. 신천 인근에 단칸 셋방을 어렵사리 구했다.

"어머니는 청과물시장의 경매물건을 날라주거나, 소금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장사를 했습니다. 제때 끼니를 챙길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죠. 성보재활원 원장 할머니의 도움으로 어머니가 원생들 옷을 삯바느질하면서 그나마 생활이 안정되었습니다. 물론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습니다."

신천초교를 졸업하고, 청구중학교에 다닐 때는 새벽에 신문을 돌리며 가게에 보탬이 되려고 애썼다. 학교 성적은 우수했다. 담임선생님은 (고교 입시 마지막 해) 경북고 진학을 적극 추천했다. 이 원장도 경북고 진학을 꿈꿨다. 그러나 단지 '꿈'일 뿐이었다. 가정 형편상 꿈이 현실이 되기는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대구상고로 진학을 결정했다.

"사춘기 시절, 저는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지독하게 가난할까? 더군다나 고교 1학년 때 대구상고가 대통령기 야구 결승에서 경북고에 참패하면서 정말 모든 게 다 싫어졌습니다. 야구도 싫고, 노는 것도 싫고…. 진학할 때는 당연히 전교 1등을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제 오로지 공부밖에 없다' 생각하고 신문배달도 그만뒀습니다."(이 원장은 차석으로 졸업했다)

가난의 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고교 졸업 때 '동일계 진학'이라는 게 생겼다. 대학 정원의 10% 범위 내에서 상고 졸업생은 경영대학에, 공고 졸업생은 공대에 진학할 수 있는 제도였다.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가난이 또 발목을 잡았다. 먹고사는 게 우선이었다. 또다시 가난에 떠밀려 한국은행에 취직했고, 남들이 하는 대로 영남대 경영학과 야간부에 입학했다.

◆세상에 고마움을 느끼다!

발령이 한국은행 서울 본점으로 났다. 가족이 있는 대구로 보내달라고 수차례 요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졸자와 대졸자 간 차이를 경험하면서 스트레스도 높아졌다. 2년 만에 한국은행을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와 영남대에 복학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좀 모으기는 했지만 매 학기 장학금을 받아야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학교 공부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남대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존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영남대 대학원 입학시험 전체 수석과 서울대 대학원 경영학과에도 수석 합격했습니다. 이번에는 고민 끝에 서울대 대학원을 진학했고, 대학원 졸업 때도 수석 졸업을 했습니다. 군 문제는 석사장교 시험에 합격해 해결했습니다.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한 달간 집중 공부해 합격한 것은 정말 짜릿했습니다."

이제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영남대 전체 수석 졸업, 서울대 대학원 경영학과 수석 졸업'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지키고 싶었다.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유학을 결심한 것이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2년간 근무하며 유학을 준비했다. 하버드대학 입학을 조건으로 국제로타리클럽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기로 했다.

"학부와 대학원 전공 성적이 최상위인데다 토플 만점, GMRT'GRE(미국 대학원 진학을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에서 한국 최고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그해 조직행동학 전공을 선발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에 지원해 합격했는데, 과연 국제로타리클럽에서 이를 인정해 줄지 여간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그토록 염원하며 전력을 기울여 준비했던 '세계 최고 대학으로의 유학'이라는 꿈이 좌절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기우였다. 국제로타리클럽에서는 흔쾌히 '하버드대학=와튼스쿨'을 인정해주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세상이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구나. 나도 반드시 성공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지' 하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테크노파크, 운명이었다

유학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영어시험과 현장에서의 의사소통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극심했고, 건강마저 좋지 않았다. 휴학 중에 지도교수가 같은 아이비리그 대학인 코넬로 옮겼다. 이 원장도 지도교수를 따라 와튼스쿨에서 코넬로 옮겼다.

"코넬대학으로 옮긴 뒤 휴학으로 낭비한 시간을 만회하겠다는 각오로 오로지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3년 6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코넬대에서 전공 개설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통상 5, 6년 정도는 걸리거든요. 대구상고 시절 배운 영문타자가 강력한 무기가 됐습니다. 남보다 보고서나 논문을 훨씬 빨리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1996년 3월 이 원장은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로 왔다. 서울대 교수 초빙에도 같이 응모했지만 면접에서 탈락했다. 가슴 한쪽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데 신임 교수에게 학교 측은 '시범 테크노파크 사업 기획팀'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희술(초대 사업단장), 이성근(전 대구경북연구원장), 한동근, 김재웅, 이상천(전 영남대 총장) 교수 등이 함께 참여했다. 1997년 12월 경북은 대구, 광주, 충남, 경기, 인천과 함께 시범 테크노파크 대상으로 선정됐다. 1998년 경북테크노파크 정식 출범 이후 이 원장은 초대 기획부장'부단장으로 '인연'을 이어갔다.

"만일 그때 테크노파크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다른 대학으로 옮겼을지도 모릅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테크노파크는 이 원장이 배운 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완벽한 현장이었다. 이탈리아 중소기업의 산업경쟁력이 조직 간 협력을 바탕으로 한 네트워크와 파트너십에서 나온다는 점에 주목, 지역 내 산'학'연'관 연계협력과 이를 통한 성공사례 창출에 노력했다. 또 유행에 따라 신산업을 좇기보다 지역 기반산업의 고도화를 강조했다. 그 덕분에 경북테크노파크는 4번 연속 전국 최우수 테크노파크로 선정되는 성과를 올렸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경북테크노파크 사업단장직을 수행할 때는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2004년 '제1회 대한민국지역혁신박람회'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경북테크노파크 부스를 찾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실세 총리로 불리던 이해찬 총리가 경북테크노파크를 직접 방문해 지역혁신의 성공모델로 격려했습니다."

◆1조원 매출, 첫 유니콘파크에 오르다

사업단장 퇴임 후, 이 원장이 최고경영자로서 경북테크노파크로 되돌아온 것은 6년 만인 2014년 9월이었다. 경북테크노파크가 새로운 활력을 갖기 위해서는 진정한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여론 때문이었다. 물론 이 원장은 그 기간 중에도 정부의 중소'벤처기업 정책과 인력양성 문제 등에 대해 꾸준한 자문과 연구를 이어왔다. 6대 원장 임기(2014년 9월~2017년 9월) 중 이룬 성과는 놀라웠다. 그동안 축적된 노하우와 네트워크, 신뢰자본이 시너지 효과를 십분 발휘한 덕분이다.

신성장동력 확보와 균형발전을 위한 국책과제 발굴로 1천122억원의 국비를 확보했고, 기술지원'기술사업화 성과'유관기관 우수연계협력 3개 분야에서 3번의 장관상(산업통상자원부'미래창조과학부)을 수상했다. 이 기간 동안 지원기업의 매출은 5조7천억원에서 8조6천억원으로 51% 늘어났고, 고용은 1만280명에서 2만46명으로 95% 급증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경북테크노파크 입주기업의 매출이 1조원을 돌파하면서 전국 최초로 유니콘파크(=기업가치가 1조원이 넘는 벤처기업을 일컫는 유니콘기업을 본떠 매출 1조원이 넘는 테크노파크를 가리키는 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경북테크노파크는 초기 스타트업 벤처에서부터 글로벌 기업까지 다양한 기업군을 갖춘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해 11월부터 임기 3년을 새로 시작하는 이 원장은 "수도권에 비해 연구개발 역량이 취약한 경북은 대학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그러나 경북테크노파크는 대학타운에 위치하면서도 그동안 대학의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면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대학의 참여를 이끌어낼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우수 강의, 최우수 연구의 비밀

이 원장은 교수 임용 이후 20년이 넘도록 수많은 교내외 보직을 담당해 왔다. 얼핏 폴리페서의 한 부류로 오해받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원장은 교육과 연구에만 전념해도 한 번 수상하기 어려운 '최우수 강의대상'을 3회, '최우수 연구상'을 2회나 수상했다. 또 최근 5년간 '사회과학논문 인용색인'(SSCI) 논문 5편, SCOPUS 논문 1편, 국내 연구재단등재지 논문 25편, 정책연구과제 15건, 저서 5권, 번역서 3권 등의 실적을 가지고 있다. 집필한 '기술인사 및 조직관리' 교재는 서울대, 성균관대, 한국기술교육대학, 포스텍에서 사용하고 있다.

"글 쓰는 일은 주로 주말이나 휴일을 이용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테크노파크와 대학을 분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테크노파크 현장에서 연구주제를 찾고, 논문을 쓰면서 터득하는 이론을 테크노파크 경영의 이론적 기반으로 활용하면 서로 윈-윈하는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저는 테크노파크 경영의 참여가 오히려 교수나 학자로서의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원장은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절박함을 갖고 끊임없이 도전하며 살아왔다"며 "내가 있는 위치에서 작지만 사회변화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세상 누구를 지금의 내 자리에 데려다 놓아도 더 열심히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각오로 노력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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