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흥] '가장 한국적인 길' 안동 선비순례길

낙엽 위로 걷다, 선비의 길 따라

안동 선비순례길만의 차별점을 꼽자면 안동호 수면 위를 걸을 수 있는 1㎞에 달하는
'바스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를 벗 삼아 안동 선비순례길을 걸으면 옛 성현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 낙엽 가득한 1코스 선성현길에 들어서면 1㎞ 수상길이 보인다.
제1코스의 출발지인 오천유적지는
안동 선비순례길만의 차별점을 꼽자면 안동호 수면 위를 걸을 수 있는 1㎞에 달하는 '선상수상길'이다.
제1코스의 출발지인 오천유적지는 '군자마을'로 잘 알려진 곳으로, 광산 김씨 예안파가 약 20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살아온 마을이다.

물 흐르듯 유유자적…뒷짐도 한번 지어볼까

"사각사각,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는 귀를 기울여야 감상할 수 있는 현악 연주의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처럼 귓전을 간질인다. 그렇게 늦가을은 속삭임으로 다가온다.

찬바람이 거리를 휩쓰는가 싶더니 찬란했던 단풍도 다 타버리고 이제 마른 잎새만이 뒹군다. 늦가을의 낭만은 뭐니뭐니해도 낙엽을 밟으며 거니는 것이다. 찬바람에 옷깃을 세우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한 잎 두 잎 춤을 추며 떨어지는 잎새를 감상하다 보면, 가슴속에서도 시린 한 줄기 바람이 일었다 사그라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이맘때쯤이면 떠오르는 레미 드 구르몽의 시다.

최근 개방한 안동 선비순례길은 '가장 한국적인 길'을 내세우고 있다. 곳곳에 오래된 고택과 서원, 역사적 명소들이 즐비하다. 굽이굽이 돌아감은 9개 코스의 순례길 곳곳에 스토리가 깃들어 있다. 특히 시리도록 푸른 물 위를 거닐 수 있는 선성수상길은 사진찍기 좋은 곳으로 이미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낙엽 가득한 안동 선비순례길을 걸으며 시리도록 차가운 공기 속 옛 성현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의 향취를 느끼다

제주 올레길이 인기를 얻으면서 지방자치단체마다 '걷기길' 조성 열풍이 불어닥친 지도 벌써 몇 해다. 전국의 명소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 호젓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10월 31일 개방한 안동 선비순례길만의 차별점은 제1코스에서 가장 도드라진다. 안동호 수면 위를 걸을 수 있는 1㎞에 달하는 수상길이 있기 때문이다. 몇몇 곳에서 짧은 수상데크를 걸어볼 수는 있지만, 마치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수상길은 안동이 유일하다.

1코스 '선성현길'은 오천유적지에서 출발한다. 오천유적지는 '군자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광산 김씨 예안파가 약 20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살아온 마을이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한 문화재를 현재의 자리(와룡면 군자리길 29)로 옮겨 원형 그대로 보존했다. 오천이라는 지명은 우리말로 '외내'라고도 하는데, 외내는 마을 수몰 전 맑은 개울이 낙동강으로 흘러든 데서 비롯됐다. 또 물이 맑을 때 물 밑에 깔린 돌을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해서 까마귀 오(烏)자를 써 오천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

군자마을은 시간을 수백 년 전 조선시대로 돌려놓는 곳이다. 오래된 고택의 정취가 포근하게 사람을 감싸 안는다. 한옥의 날렵한 처마 곡선이 늦가을 오후 햇살을 받아 빛나면서 한층 운치가 더해졌다. 마루 아래는 코앞에 다가온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포개 놓은 장작이 그득하다. 보기만 해도 온기가 도는 느낌이다.

이곳의 백미는 탁청정(濯淸亭)이다. '수운잡방'의 저자 김유가 1541년(조선 중종 36)에 세운 정자로, 영남지방의 개인 정자로는 구도가 가장 웅장하고 우아하다는 평이다. 탁청정이라는 정자 이름은 굴원의 '어부사'에서 따왔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 세상이 도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맑으면 벼슬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등지고 은일의 삶을 즐기겠다는 뜻을 담았다. 편액 글씨는 한석봉의 작품으로, 현재 걸려 있는 편액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그외에도 군자마을에는 침락정과 후조당, 역동유허비 등을 돌아볼 수 있다.

◆차가운 물위를 거닐다

군자마을을 뒤로하고 산모롱이 굽이굽이 돌아가는 선비순례길 1코스로 접어들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가 친구처럼 나와 동행하다 보니, 어느새 길은 데크로 바뀌어 있다. 목재 데크를 걸으며 생기는 '통통' 나무 울리는 소리도 좋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보광사에 닿았다. 그리 크지 않은 절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곳이다. 이곳의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고려 불교문화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문화재다. 특히 관음보살상은 화려한 보관, 정교하게 장엄된 영락 장식 등 품격 높은 고려 불교문화의 한 단면을 뚜렷이 보여준다. 보광사에서 400m만 걸어가면 선성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선비의 '갓'을 형상화한 순례길 안내판이 이곳이 안동 땅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안동 선비순례길은 여느 길과 달리 지루할 틈이 없다. 곳곳이 명소이자 쉬어갈 포인트다.

이후 예끼마을(도산 서부리)에 닿았다. 이곳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을이다. 예술가들이 마을에 들어와 터전을 잡으면서 골목골목에 작은 갤러리, 작가 레지던시, 카페가 숨어 있다. 만약 선비순례길의 백미인 '수상길'만을 걷고 싶다면 이곳에서 출발하면 된다.

안동호 수면 위에 길이 1㎞, 폭 2.75m 규모로 설치된 선성수상길은 수위 변화에도 물에 잠기지 않도록 부교(浮橋)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이곳에서는 안동호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배를 타지 않아도 한가운데서 굽이치는 호수를 둘러싼 호안선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바람에 불어온 낙엽이 물 위에 떠가고, 햇살은 장판처럼 매끄럽고 잔잔한 호수를 금빛으로 수놓는다. 물 위에 떠 있는 다리이지만 흔들림은 그리 크지 않다.

수상길 한가운데는 학교 교실을 모티브로 한 작은 쉼터도 마련됐다. 이 자리가 바로 수몰 전 예안초등학교가 있던 위치이기 때문이다. 칠판을 형상화한 조형물 양편으로 옛 초등학교 흑백 사진이 전시돼 있고, 뻥 뚫린 칠판은 안동호의 풍경으로 채워진다. 풍금도 놓여 있어 포토존으로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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