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수학능력시험 시계의 바늘이 거꾸로 돌아 수험생들은 다시 마지막 관문 앞에 섰습니다. 일주일 전, 수능시험 12시간을 앞두고 내려진 연기 결정은 그 누구도 예측 못 한 일이었지요. 오직 이 순간을 위해 달려온 나날이었기에 수험생들의 당시 심정은 혼란과 당혹 그 자체였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지진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는 포항의 또래 수험생들을 먼저 걱정했습니다. 손때 묻은 교재와 문제집을 버린 뒤였지만 다음 날 책더미 속을 뒤져가면서도 "내가 사는 곳에서 지진이 났으면 어떡할 뻔했느냐"며 수능 연기가 '잘한 결정'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지진 이후 한 고3 아버지가 딸의 반 친구 단체톡이라며 SNS에 소개한 글이 화제가 됐습니다. "경주 지진 때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수능 연기하는 것 보니 '나라다운 나라'가 된 것 같다" "우리는 수능을 연기시킨 역사적인 고딩(고등학생)" 등등의 내용입니다. 이 아버지는 "시험이 연기돼 허탈하고 황당했을 텐데 차분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생들이 멋지다"고 치켜세웠습니다.
여러분들의 의연한 대처는 수능 연기가 초래할 혼란을 걱정하는 일부 어른들을, 일주일 '족집게 특강'으로 반짝 특수만 노리는 기성세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 지진 불안으로 시험을 망치면 내가 대학가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포용하는 마음을 보여줬습니다. 이번 수능에서 얻는 점수를 떠나 공정한 경쟁의 가치를 배운 여러분들은 이미 진정한 승자입니다.
2018학년도 수능을 치르는 고3은 대부분 세기 말에 태어난 1999년생들입니다. 한 해 아래인 '밀레니엄 베이비'처럼 주목받지도 못하면서 초'중'고를 거치는 동안 참으로 얄궂게 국가적 시련을 마주했습니다. 초등학교 땐 세계적으로 신종플루가 유행했고, 중학교 땐 세월호 참사, 2년 전엔 메르스 사태를 겪었습니다. 전국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수학여행이 취소되는 바람에 학창시절 변변한 추억조차 못 가졌지만 지진이라는 천재지변이 닥쳐도 꿋꿋하게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이 주역이 되는 미래에는 반칙과 특권이 사라지리라는 희망을 품습니다.
오늘은 그저 '대학에서 학문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받는 날입니다. 성적에 따라 매겨지는 수학(修學) 능력의 묘한 서열만이 아니라 능력의 '크기'도 평가받게 됩니다. 온갖 부정한 방법과 특혜로 노력 없이 대학에 입학한 누군가를 보면서 회의감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시험장을 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결과도 중요하겠지만 '최선을 다해보는 경험'은 단지 수능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학생에서 어른으로, 학교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새로운 문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도 있겠지요.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을 때마다 여러분 가장 가까이에서 대신해 줄 수 없는 안타까움과 간절한 바람을 간직한 부모님과 선생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포항의 5천523명을 포함한 전국 수험생 여러분, 어렵고 힘든 시간을 정말 잘 견뎌냈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멋진 미래가 시작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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