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학교에서 자리 이동을 하면서 A와 짝이 되었단다. 어떤 아이냐고 물으니 "우리 반 인기짱이야"라고 했다. 공부를 잘해서? 춤과 노래를 잘하나? 하지만 딸이 말한 인기짱의 비결은 의외였다. "걔 서울에 자기 집 있어." 당황스러웠다. A의 부모는 수년 전 서울에 A의 이름으로 작은 집을 하나 장만했단다. 자녀가 대학 갈 때를 대비해 재테크를 한 것이다. 그 집값은 오르고 또 올라 지금은 대구 집값을 넘어섰으니 성공한 셈이다.
A는 친한 친구가 생기면 "우리 대학생 되면 같이 살자. 서울 가면 우리 집에서 공짜로 살 수 있어"라고 말하는 통에 '금수저 A'로 유명세를 탄다고 했다. 서울에 집 있는 것이 무슨 인기비결이냐고 했지만 딸이 되물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다른 부모님들은 A랑 친하게 지내라고 하는데, 아빠는 아니야?" 순간 망설였지만 결국 "너도 A랑 친하게 지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집값으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던 차에 얼마 전 들려온 재경 대구경북학숙 소식은 참으로 반갑기만 했다.
대경학숙은 권영진 대구시장의 공약 중 하나다. 지역 출신 인재들이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고 면학에만 집중해 차세대 리더로 육성하는 인재양성 요람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약이 장기과제로 수정됐다. '청년 유출을 막아야 할 시점에서 역행하는 처사', '지역 대학생 역차별'이라는 일부 부정적인 여론에 떠밀린 탓이라고 했다. 대부분 지역 대학에서 나오는 반대 목소리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기적인 발상이다. 재경학숙의 존재 여부가 서울 유학을 결정하는 요인이 될 수 있나? 지역 대학생과의 역차별을 조장한다는 주장은 더더욱 맞지 않다. 오히려 재경학숙이 유학생의 고향 사랑, 지역 사랑을 일깨워주는 교육적 효과가 더 크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가슴에 와 닿는다.
꼭 10년 전인 2007년에 대구시와 경상북도, 전직 시도지사 모임인 '대경회', 재경시도민회 등이 대경학사 건립 논의를 본격화했었다. 그때 일찌감치 서울에 학숙을 짓고 지역 인재를 키웠던 곳을 찾아 노하우를 취재한 적이 있다.
서울 신림동에 소재한 한 광역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재경학숙. 현관에 걸린 글이 무척이나 인상깊었다. '고향과 부모님께 부끄러운 자는 이 문을 드나들지 마라', '강원도에 사람 없다는 말만은 듣지 않게 하라'. 등'하굣길에 반드시 마주치는 이 글을 보고 유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학숙 관계자는 "이곳을 거쳐 간 학생들은 사회에 진출해서도 고향에 큰 힘이 된다. 아무래도 힘든 학창 시절, 고향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다는 생각을 잊지 않는다"고 자랑했다. 실제 이 학숙 졸업생 모임인 '숙우회'는 고향 발전은 물론 학숙에 있는 후배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또 회원 개인이 기탁한 장학금으로 기금을 조성해 학숙을 운영하는 재단에 기부한 금액이 수억원에 이르고 있다.
다른 지역의 재경학숙도 다르지 않다. 졸업생 모임은 후배들을 지원하기 위해 장학기금을 만들고, 각계각층에 포진한 뒤엔 고향 발전에 뛰어든다. 업무 추진이나 의사 결정 등에서 과거 받았던 고향의 은혜에 보답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시·도가 재경학숙을 다닌 인재들로 구성된 '학숙 네트워크'를 지역 발전에 적극 활용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재경학숙은 돈 없는 서민의 자식들이 이용하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재경학숙이 청년 유출을 심화시키고, 지역 대학생들의 역차별만 양산한다는 그릇된 이기심에서 벗어나 우수 인재들을 고향의 지원으로 공부하게 한 뒤 애향심을 심어주고 추후 지역을 위해 일하거나 유턴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지적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청년들의 꿈을 언제까지 꺾을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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