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태움'의 불씨도 경계하자

전 MBN 앵커
전 MBN 앵커

지난주 '태움 문화'라는 단어가 실시간 검색어에 등장했다. 생소한 낱말이었지만 얼핏 유추해봐도 무엇인가를 태우는 것에서 유래해 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일 터. 이어지는 '간호사의 태움 문화'라는 기사의 제목에서 그 뜻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처럼, 자신을 태워 주위를 따뜻하게 만드는 연탄처럼, 환자를 돌보고 살피는 일을 단순한 업무로 생각하지 않고 본인의 에너지와 열정을 태워 아픈 이들을 위해 헌신한다는 간호인들의 태움. 존경의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 어떤 찬사도 부족했다. '백의의 천사'라는 명칭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간호인들의 희생과 봉사정신에 다시 한 번 진심을 다해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이 마음은 오래갈 수 없었다. '간호사의 태움 문화'는 내 자의적 해석과는 생판 달랐다. '재가 될 때까지 태움'이라는 표면적 의미는 같았지만 내막은 상상을 초월했다. '태움 문화'는 간호계의 군기 잡기에서 비롯됐으며 선배가 후배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아 재가 될 때까지 괴롭힌다는 뜻. 오죽했으면 문화로까지 굳어져 신조어로 탄생했을까. 간호업계에 만연한 '태움'은 최근 이슈가 된 '성심병원 섹시 댄스 사태'로 추악한 모습을 드러냈고 온갖 부당함에도 입을 틀어막았던 간호사들은 폭탄 같은 증언을 쏟아냈다.

불규칙적으로 돌아가는 3교대에 10시간 가까운 근무도 힘든데 밥 먹을 시간조차도 내기 쉽지 않은 살인적인 업무, '임신순번제'는 이미 오랜 역사와 전통, 초과 근무 수당은 포기한 지 고릿적이라는 불합리한 현실에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것 같은 36만원 '열정페이'까지. 악몽 같은 여건을 견뎌내기도 쉽지 않은데 그들을 더 지옥으로 밀어 넣는 것은 '태움 문화'라고 그녀들은 얘기한다. 모욕적인 꾸짖음과 인신공격성 욕설, 업무 외 챙겨야 하는 회식, 체육대회, 장기자랑 행사 참여로 결국 나이팅게일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그들만의 문화일까. '하늘 위 군기'로 항공사 승무원들의 상사 갑질도 이미 언론에 오른 적이 있고 대학생들의 군기 잡기는 해마다 보도되는 뉴스의 단골 소재가 됐다. 대한민국 곳곳의 크고 작은 사회에서 '태움'은 고질적인 병폐 문화로 자라왔다. '태움'은 직장 내 기강을 다지기 위한 통과의례나 당연한 교육이 아니다. '태움'은 엄연한 학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작게는 상담치료에서 심한 경우 유산과 사산을 경험하고 자살하는 사례까지 늘고 있다고 한다.

엊그제 전 직장 선후배들과의 송년회 모임이 있었다. '태움 문화'가 안줏거리로 올라오자 후배들의 말이 많아졌다. 간호사와 승무원으로 일하는 친구들의 실화를 전하자 모두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 대화는 자연스레 우리의 과거로 이동했다. 이미 퇴사한 사람들의 모임이었기에 웃음 속 뼈 있는 후배들의 발언은 거침없었다. "선배, 우리도 신입 때 장기자랑 나갔잖아요~ 그때 사원들 앞에서 춤 추는 거 끔찍하게 싫었어요." "저도 새벽 방송하는데 꼬박꼬박 저녁 회식에 다 참석했잖아요~ 그때마다 한숨도 못 자고 출근했어요." "저는 회사 들어와서 술 많이 늘었잖아요~ 선배가 술은 먹을수록 는다더니 이제 소주 한 병은 거뜬해요!" 한때 앵커팀의 군기반장이라 불렸던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머릿속에선 변명거리가 맴돌았다. '우리 장기자랑은 절대 선정적이지 않았고, 회식은 강제 참석도 아녔고, 술은 적당히 먹으라고 한 거지.'

물론 후배들도 범죄에 가까운 '태움 문화'와 우리의 추억은 비교 불가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태움'의 조그마한 불씨도 경계해야 된다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 날 모임에 안건으로 가져갔던 '분기별 회식 정례화' 논의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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