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른 아침에] 특성화고 실습생의 죽음

한국경제사회연구회 이사. 대검찰청 검찰개혁자문위원회 위원. 시화법률특허사무소 미국변호사. 원전특허법률사무소 미국변호사. 사우스웨스턴대 대학원 법학 박사. 경희대 법학과 졸업
한국경제사회연구회 이사. 대검찰청 검찰개혁자문위원회 위원. 시화법률특허사무소 미국변호사. 원전특허법률사무소 미국변호사. 사우스웨스턴대 대학원 법학 박사. 경희대 법학과 졸업

교육 실습 아닌 직원처럼 근무

소득 높아져도 대우는 그대로

운 나쁜 한 학생의 비극 아니야

현장의 문제 정부는 조사해야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 옛날 얘기는 아무리 '내가 왕년에'라는 말을 해도 '꼰대의 넋두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흙수저'가 어쩌다 좀 잘됐다는 스토리가 감동으로 다가오는 시절은 더구나 아니다. 잘못하면 구질구질한,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반응이 앞서는 시대다. 내 신상 얘기를 망설인 이유다. 그렇지만 꼭 하고 싶다. 제주도에서 특성화고 3학년 실습생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접한 때문이다. '꽃다운 나이'라고 말하기도 무엇한 불과 만 18세의 나이다. 슬픔과 분노가 앞서지만 이 글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먼저 해본다.

사람들에게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특이한 학력에 대한 의문이다. 매일신문 칼럼 집필 초기 이력란에 중고교 학력까지 실린 적이 있었다. 중졸 검정고시, 서울공고 졸업.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만 그다지 자랑할 것도 없는 이력이 더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묻곤 한다. 어떻게 공고에서 법대를 갔나요? 뭐 그렇게 됐습니다. 그때마다 적당히 얼버무리곤 한다. 물론 적성이 맞지 않아서였다. 고등학교 과정이어도 공학계열 과목에 도무지 정이 붙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 공고 졸업 후의 현실을 알게 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진학 공부를 하느라 3학년 2학기 현장실습을 나가지는 않았어도 여러 경로를 통해 실상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정부 주도로 한창 공업계 육성 바람이 불었다. 현실은 그런 선전과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대기업 취업의 행운을 잡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기능공'의 열악한 일상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거의 모든 고교 친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학에 진학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무려 40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으려니 믿고 있었다. 강산이 변해도 몇 번 변했는가. 과거와 비할 수 없이 인권의식도 높아졌고 정부의 감독체계도 강화되었으리라. 중소기업 현장에서는 일손 부족으로 아우성이란 말도 숱하게 들었다. 사람 귀한 줄을 알게 되었거니 생각했다.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이른바 실습생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어쩌면 더 참혹한 현실을 맞고 있지 않은가.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아무리 가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직장 하나 잡은 것으로 만족하며 눈치를 살펴야 했다. 삶의 수준이 몰라보게 달라지고 고교 졸업생 대다수가 대학에 진학하는 요즈음이다. 친구들과 달리 취직 전선에 일찌감치 뛰어들어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오죽 스산할까. 게다가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사실상 노동착취를 당한 끝에 과로로 혹은 사고로 스러져 가다니. 심지어 너무 힘들어 목숨을 끊은 경우까지 있다. 그들의 마음이, 그들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 너무 먹먹하다.

이번에 사망한 이모 군은 기계에 목이 끼어 사망했다고 한다. 리프트를 조작할 수 있는 직원이 현장에 아무도 없이 혼자였다. 교육을 위한 실습이 아니라 사실상 직원처럼 근무하게 한 것이다. 유형은 다르지만 거의 매년 불상사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량 인명 사고가 나지 않아서인가. 사회적으로 집단적 목소리를 내지 못해서인가. 매년 6만여 명이 실습 교육을 나가지만 선거에 표가 안 돼서인가. 언론의 비판이 이어지면 교육부, 고용노동부 등이 잠시 나서는 척, 그때뿐이다. 함께 문제 해결 노력을 해야 할 학교들도 취업률 올리기에만 목을 맨다. 학생들이 스스로 나서 사건을 조사하고 촛불시위 등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40년간 소득이 수십 배 늘어났지만 사람에 대한 대우만은 그대로인 듯하다.

다시 한 번 간절한 바람을 말한다. 슬픔과 분노만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 운 나쁜 한 학생의 비극으로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른들은 학력보다 실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대학에 안 가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한다. 그런 말로 실상을 호도해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부터 무엇이 문제인지 해결책을 강구하는 정부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고인의 가족이 원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어른들이 조금은 덜 부끄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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