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라면 그렇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지 않았다면?'이란 가정도 그런 범주에 들어간다. 한반도의 모습이 지금과는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달라졌을까? 통일국가가 들어섰을 수도 있었겠지만, 중국의 속국화(屬國化)를 피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장제스(蔣介石)는 2차 대전 종전을 앞두고 일본 패망 후 연합군이 한반도에 진주할 때 중국군도 파견해 한강 이남은 영국'미국군, 이북은 중국군의 관할 아래 둔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목적은 한반도를 중국의 영향권 내에 묶어두는 것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한반도 진주 연합군의 비율을 '중국군 4, 미'영국군 1'로 한다는 장제스 참모들의 구상이다. 단순한 전후 처리 참여라면 많은 비용을 들여 미'영의 4배나 되는 병력을 보낼 필요가 없다. 그런 목적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일본군의 항복 후 구성될 임시정부의 외교'국방'경찰 부문은 3년 기한으로 중국인 고문을 둔다는 '고문정치' 구상이다. 한반도 주둔 중국군을 지렛대로 외교'안보와 국내 치안까지 중국의 통제하에 두겠다는 것이다.
장제스가 충칭(重慶)으로 옮긴 우리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당시 임정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이를 정확히 꿰뚫어봤다. "장제스가 왜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느냐"는 중국 주재 미국 대사 클러렌스 E. 고스의 질문에 조소앙은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 패망 뒤 한반도를 중국의 종주권 아래에 두려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1942년 2월 12일 자 미 국부무 외교문서)
물론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지 않았다면 장제스의 구상이 실현됐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럴지 그렇지 않을지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장제스가 한반도 종주권 회복을 획책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4월 시진핑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한 것은 중국 정부의 색깔이 푸르든 붉든 종주권에 대한 집착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마오쩌둥도 대장정 때 한반도에서 중국의 종주권 상실에 울분을 토했다.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집요한 반대는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킬 때 그 의미가 명확히 드러난다.
문재인 정부가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갖고 있었어도 사드 배치를 놓고 그렇게 난리 치지 않았을 것이다. 사드를 '도둑 배치'했다고 떠들어댄 문 정부를 보고 시진핑은 종주권 회복이 실현 가능하다는, 그것도 자신의 시간표보다 앞당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을 것이다. 바랐든 안 바랐든 문 정부는 중국의 시간표대로 가고 있다. '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에 참여하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3불(不)' 선언까지 했다.
이는 안보주권을 중국의 처결에 맡긴 굴욕적 자해다. 문 정부는 '3불'이 '입장 표명'이라고 한다.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약속'이라 한다. 오만한 언사로 3불의 조속한 이행은 물론 '이미 배치된 사드 시스템의 사용도 제한해 중국의 전략적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하라'는 '1한(限)'까지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결국 입장 표명이든 아니든 문 정부는 엄청난 전략적 실수를 한 것이다.
청일전쟁 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는 "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고 돼 있다. 이는 조선의 자주독립국 지위 인정과 일본의 한국 지배를 위한 청이란 걸림돌 제거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의미는 전자다. 어쨌든 우리가 처음으로 중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난 것은 이 조약에 의해서였다. 중국의 일관된 목표는 한반도의 '현상'을 그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문 정부는 스스로 그 길로 들어서려 한다.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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