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명당에 살다

나는 명당에 산다.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내가 사는 동네는 야트막한 옛 산비탈에 크고 작은 주택들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집집이 마당에 나무들이 즐비하여 자주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동네 이름이 '교수촌'이라 덤으로 교수인 양한다. 큰 신작로 하나를 건너면 '형제봉'이라는 등산하기에 적당한 푸른 숲 속이 나온다. 지금쯤 바람에 못 견딘 붉은 도토리나무가 온 산을 윙윙대며 협주곡을 이루고 그 산모퉁이를 돌아 내려가면 큰 호텔이 서 있는 동촌유원지가 있다. 여름날이면 동촌에서 배를 타고 강물을 휘저으며 놀기도 하고, 그러다가 지치면 거꾸로 흐르는 금호강에 발을 담그고 하나둘 청둥오리를 헤아려 보기도 한다.

강둑을 넘어 '패밀리파크'에서 석양이 함몰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고즈넉한 시골 풍경이 지금은 사라진, 영락없는 내 고향이다. 봄날 '패밀리파크'에 가면 노랗게 달아오른 개나리와 눈발같이 흩날리는 벚꽃이 장관을 이룬다. 그 속에서 몇 몇의 사람들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파크 골프를 즐기면서 시간을 낚기도 한다. 어느 이국의 휴양지에서 보는 그림이다.

금호강을 거슬러 둑길을 한참 걷다 보면 경산에서 흘러드는 남천과 욱수천을 만난다. 가끔 완행열차가 참깨 벌레처럼 스멀거리며 지나가기도 하고 초여름 무논에서는 개구리들이 울어서 난리다. 언덕 위 쑥대밭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면 물살에 흔들리며 깨지는 불빛이 한 폭의 수채화다. 멀리 박주영 축구장에 마실 나온 이웃 동네 사람들 구경까지 하며 천을산 참꽃 향기에 젖기도 한다. 고산 들녘의 두렁이 높지 않은 포도밭에 앉아 입술이 퍼렇도록 포도 알을 깨물면서 주제가 없고, 의미도 없는 각자의 말들로 떠들면서 놀아도 누가 간섭하지 않는다. 가끔 농막에서 포도주를 한잔 하며 어제와 같은 내용,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도 재미있다고 웃어주는 동네 친구들, 타향에서 만났지만 자매 같다. 포도밭 가를 돌아 흐르는 작은 냇가에서 오래전 추억을 떠올리며 계절마다 달리하는 우리 동네는 고향 같은 명당임이 틀림없다.

오지랖 넓게도 나는 잘해 주지도 않으면서 사람들을 곧잘 집으로 초대한다. 구경거리가 되지 못하는 옥상의 가지와 풋고추를 자랑하면서 겨우 두어 포기 자란 상추를 두고 평상에 앉아서 삼겹살 굽자고 허풍을 떤다. 어쩌다 골목에 날아든 산새 한 마리에도 나는 많은 지인들에게 자랑했다. 우리 동네에는 산새가 지저귀며 노래한다고.

이호우 시인은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고 했다. 그래 키 작은 산에서 새가 지저귀며 시냇물 흘러가는 동네에 정겨운 이웃이 있는 곳이 고향이다. 마당의 감을 따서 집집마다 돌리는 동네, 모두가 방안에서 책만 읽는지 조용해서 적막하지만 평온한 동네다. 어디나 정드는 곳이 명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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