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나 양배추를 넣고 찐 파이인 '피로츠키'는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서민들의 음식으로 각광받아왔다. 지금도 거리를 지나다 어디서든 피로츠키를 사먹을 수 있다. 피로츠키는 러시아 혁명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낸 음식이기도 하다. 혁명의 주역이었던 트로츠키는 자신이 기록한 러시아 혁명사에서 10월 혁명 후에 제대로 먹을 시간도 없었던 긴박한 상황에서는 항상 차와 피로츠키가 그의 식사대용이었다고 밝혔다.
트로츠키는 혁명의 주역이었으나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뒤 멕시코로 망명했다가 1940년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운전사에 의해 암살당했다. 트로츠키라는 이름은 소비에트 시대 내내 지워졌고 최근까지도 러시아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10년 전 시베리아의 도시 크로스나야르스크의 혁명사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트로츠키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주 전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정치역사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는 레닌과 함께 찍은 트로츠키의 사진들이 복원돼 있었다. 트로츠키의 복권을 보면서 러시아도 이제는 과거의 역사를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국가로 성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17년의 2월 혁명으로 차르가 물러나고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라는 이중 권력이 들어섰다. 두 권력은 협력과 대립이라는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볼셰비키는 소수였고 소비에트 내에서도 큰 영향력은 없었다. 하지만 레닌의 귀국은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의 판도를 변화시켰다. 레닌은 귀국과 동시에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정부의 해소와 소비에트로의 권력 이동을 볼셰비키의 정책과제로 삼았다. 당연히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위한 활동에 집중했다. 2월 혁명 후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봄을 체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러시아군의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고 인플레이션과 물자부족으로 인한 민중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에 도달했다. 4월 20일에는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대규모 반전시위를 벌였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임시정부는 개각을 단행하면서 볼셰비키를 제외한 사회주의자 그룹들이 참여하는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러시아는 혼란과 무질서가 지배하고 있었다.
더욱이 7월 3일부터 사흘 동안은 혼란의 극치를 보여줬다. 수천 명의 무장한 병사들과 수만 명의 시민들은 소비에트의 대표들이 있는 타브리체스키 궁전으로 행진하면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당시의 봉기는 어떤 정당이나 조직도 통제할 수 없는 완전한 무정부 상태의 소요로 발전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볼셰비키도 시위대의 요구에 침묵했고 레닌은 면담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무장시위대는 임시정부의 명령을 따르는 경찰과 군대와 충돌하면서 수백 명이 사망하는 참극을 빚은 뒤에야 해산했다.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의 무장해제와 더불어 7월 봉기의 배후로 볼셰비키를 지목해 트로츠키 등 다수의 지도자들을 구속했다. 체포령이 내려진 레닌 또한 핀란드로 비밀리에 잠적해야 했다.
볼셰비키의 기세는 7월 봉기로 인해 한풀 꺾였고 활동가들 대부분은 지하로 잠적했다. 임시정부는 레닌이 독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는 발표를 하면서 독일의 스파이라는 의혹을 조심스럽게 내비치기도 했다. 이로써 대중들은 볼셰비키를 의혹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다시 개각을 단행하면서 실세인 케렌스키를 총리로 선출한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를 군의 총지휘자로 임명하면서 군 내부와 사회의 질서를 잡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전선에서는 러시아 병사들 스스로 노동자라 칭하면서 '8시간 전투'라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코르닐로프는 전선에서의 사형제 부활이라는 법을 통과시켰다.
얼마 후,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가 군사력을 동원해 임시정부를 뒤엎고 쿠데타를 시도할 것이란 계획을 사전에 인지한다. 곧 코르닐로프를 해임하는 통지서를 발부하지만 코르닐로프는 해임을 거부하고 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해오기 시작한다. 코르닐로프의 진격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케렌스키는 볼셰비키가 장악하고 있던 병사소비에트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병사소비에트의 재무장과 더불어 트로츠키를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석방을 반대급부로 제공한다. 결국에는 병사소비에트 조직이 개입하면서 코르닐로프의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았다. 코르닐로프는 체포됐고 반란은 무위로 돌아갔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시도는 임시정부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린 반면에 볼셰비키를 부활시켰고 무장력까지 갖추게 만들었다. 더욱이 볼셰비키는 최초로 소비에트 내에서도 다수파를 차지하면서 소비에트를 좌지우지하게 됐다. 이제 볼셰비키의 권력 의지를 멈출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볼셰비키에게는 현실적인 슬로건으로 전화한다. 10월 혁명의 길이 열린 것이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전선에서는 200만의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해 탈영하고 돌아와 병사소비에트에 합류하고 있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전쟁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당시 연합국이던 영국과 프랑스에서 참전의 반대급부로 받아 오던 경제원조가 중단될 경우 경제에 대혼란이 올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레닌과 볼셰비키는 단독으로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임시정부를 붕괴시키는 일은 불가피하다고 봤다. 이를 위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한 뒤 봉기를 준비해나갔다. 어리석게도 케렌스키는 페테르부르크 근방의 부대들을 전선에 투입한다는 발표를 했다. 당연히 군대는 동요하기 시작했고 볼셰비키는 봉기를 서두르게 된다.
10월 25일 저녁, 볼셰비키는 사전에 계획한 대로 임시정부 각료들이 모여 있던 겨울궁전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임시정부의 장관들은 모두 체포됐으나 총리 케렌스키는 탈출했다. 케렌스키는 나중에 미국으로 망명해서 생을 마감했다. 10월 혁명은 무혈 혁명으로 끝났다.
볼셰비키는 무장봉기를 통해 아주 쉽게 정권을 잡았지만 그때부터 내외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이듬해(1918년)에는 독일의 침공을 우려해 수도를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옮겼지만 여전히 독일과의 정전협상이 걸려 있었다. 독일은 러시아의 혼란을 이용해 최대한 이득을 취하기 원했고 볼셰비키는 권력의 안정을 위해 전쟁에서 발을 빼기를 원했다. 러시아가 차지했던 유럽의 영토 절반과 광대한 지하자원, 식량의 생산지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조약을 맺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볼셰비키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분노한 병사들과 농민들은 반혁명군인 백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러시아 전역에서는 대대적인 내전이 시작됐고 러시아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러시아 혁명을 되돌아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을 지적한다면 권력에 대한 독점욕이다. 만약에 레닌과 볼셰비키가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연정에 참여했더라면 러시아 혁명은 훨씬 더 평화롭게 진행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해본다. 결국에는 레닌도 1918년에 여성혁명가인 도라 카플란의 저격으로 총상을 입은 뒤 1924년에 숨을 거뒀다. 카플란은 레닌을 쏜 게 아니라 사실은 러시아 혁명을 쏜 것이다. 레닌의 시체는 지금도 붉은 광장의 마솔레움(Mausoleum)에서 싸늘한 표정으로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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