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소박한 케렌시아

얼마 전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보고 오겠다며 일주일간 제주도를 다녀온 친구가 있었다. 가정주부이고 너무나 평온하게 사는 친구라 살던 대로 살면 되지 무슨 고민인가 했더니 자기도 나름대로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나 고민스럽다며 혼자 생각을 좀 하고 오겠다고 했다.

혼자 다니는 여행이 그리 쉽지는 않을 텐데 대단한 결심을 했다 싶었는데 돌아와서는 일주일이 너무 길어 오히려 힘들었다고 넋두리를 했다.

그러고 보면 휴식을 취하고 계획을 세우며 에너지를 보충하는 것이 반드시 길다고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제 선물 같던 한 해가 마지막 한 장의 달력만 남겨두면서 후회 없이 일하고 일한 만큼 성과를 기대했던 내게는 아쉬움만 많고 마무리하기엔 조급한 시간이 된 것이다.

지치고 힘들어 한 달을 잘 마무리하면 좀 쉬어야지 싶지만 당장 마무리하고 나면 돌아서서 새해를 준비해야 하는 일이 만만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잠시라도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공간은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투우장의 소가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잠시라도 숨을 고를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스페인어로 케렌시아(Querencia)라고 한다.

투우가 진행되는 동안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경기장의 특정 부분을 생각해 두었다가 군중의 고요한 흥분이 함성으로 바뀌고 분노와 죽음의 두려움이 소의 온몸을 휘감을 때 소는 생각해 둔 자신만의 안식처에 잠시 머물며 안정을 되찾는다고 한다. 아주 잠시지만 그곳에 머무는 동안 모든 힘을 다해 에너지를 모으고 안정을 되찾는 순간 마지막 죽을 힘을 다해 인간과 쟁투하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그곳에서 소는 인간이 꺾을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가진다" 고 말했다. 어디 싸움소뿐이겠는가. 매일 삶의 전쟁터에서 전투를 치르는 현대인들에게도 케렌시아는 필요하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금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곳,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절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피난처 같은 곳 말이다. 대단한 여행지의 고급호텔이 아니어도 생활 속 자신에게 위안을 가져다주는 공간이라면 그곳이 바로 케렌시아인 것이다.

나에게도 지치고 힘들 때 책도 보고 음악도 들으며 생각에 잠길 수 있는 넓은 책상이 있는 커피숍이 하나 있다.

약속 없는 퇴근길, 잠시 들러 커피 한잔하며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하고 에너지가 충전되는 곳이다. 어찌 보면 아주 소박하지만 소중한 케렌시아를 가진 셈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