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믿음은 없다

미 세인트루이스대 국제경영학 박사. 동아대학교 졸업
미 세인트루이스대 국제경영학 박사. 동아대학교 졸업

한국의 대기업·재벌 국민 희생 바탕

정부 처벌받는 경영상태 비정상적

국가의 富 분배 적절하면 국민 혜택

상대적 불평등에서 자유롭게 해야

4차 산업에서 지난 1980년대부터 축적되어 온 인공지능(AI) 기술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면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1차 산업혁명과 유사한 사회변화가 예상된다. 실제로 선진국 기업들의 근로자 환경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벌써 보고 있다. 우려되는 부분은 소비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 투입되는 노동 요소가 감소하면서 이익은 자본가에게 더 많이 집중된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야기. 최근 한 기업인이 과속으로 수억원의 벌금을 부과받았다는 소식이 있었다. 당연히 다른 나라 얘기다. 기업인이라서가 아니라 국민들의 소득에 따라 벌금이 계산되는 일수벌금제(day-fine)법 때문이다. 법은 '만인'이 아닌 오천만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적용될 때 준수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일수벌금제는 법의 위하력이 비교적 공평하게 적용되는 제도이므로 의미 있다.

사족으로, 벌금이 오만원일 때 저소득자에게는 소중한 일당에 해당하지만 고소득자에게 이런 평등한 법은 그러진 않겠지만 무시할 수준이다. 따라서 상시 존중되어야 할 상대적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사실 이벤트성으로 보일 수 있는 이 법은 핀란드와 스웨덴을 시작으로 이미 백년 가까이 시행되어 왔고,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에서도 몇십 년째 성공적으로 작동 중이다. 그리고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시작하고 있다. 교통범칙금은 한 예일 뿐이다.

언급한 유럽 국가들 특히 북유럽 국가들은 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율이 매우 높고 모두 사회주의로 분류되는 국가들이다. 이들은 주로 산업혁명 후 경제체제를 사회주의로 전환하였다. 자동 생산에 따른 대량 해고를 경험하며 직장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그 대신 정부에 의지하게 되었다. 주지하듯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대비되며 공동체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에 우선한다. 간혹 사회주의를 엉터리 공산주의와 혼동하는 유신세대가 있지만 대표적 자본국인 미국도 의료체계와 복지 등 다방면에서 사회주의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대기업이나 자본가에게는 근로자가 줄어도 이익이 생기는 구조가 되고 있다. 4차 산업에서의 신사업은 진입 장벽이 높아 어떻게 따라 해 보기도 힘들다. 어쩌다 낮은 분야는 금방 경쟁자들이 뛰어들어 레드오션(red ocean)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환경에서 믿음은 어쩌면 실망과 배신 그리고 고통의 어머니이다. 근로자를 가족같이 생각한다면 급변하는 환경이 비웃음을 날린다. 옛날처럼 한집에서 태어나 이웃과 함께 농사일을 하다 거기서 죽어야 할 때 믿음은 살기 위한 소중한 가치였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하루 전에도 몰랐던 이방인과 악수를 하며 또 헤어진다. 애초에 믿음은 쌓일 시간도 없다. 그리고 쉽게 믿다가는 자칫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믿음을 대체하고 보증하는 사회나 경제 시스템이다.

이제 정말 함께 살아야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자신이 영원한 기득권층이라고 안전을 착각할 수도 있지만 어디로 팽개쳐질지 아무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1970, 80년대 보호무역 등과 한 세대의 엄청난 희생을 바탕으로 현재의 대기업들과 재벌이 만들어졌다. 국가와 국민은 그들을 믿었지만 어느 정부에서나 처벌받는 재벌들을 보면 경영도 그다지 정상적으로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이제 믿음은 필요 없다. 국가가 나서서 전 국민의 '밥'을 챙겨야 한다. 부의 분배가 적절할 때 국민들은 비로소 4차 산업의 혜택을 함께 누릴 수 있다. 국민들이 굳이 생산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는 것이 항상 선은 아니다.

기술의 발달을 고마워하며 인간의 최상위 욕구인 자기실현을 위해 사회봉사나 삶 그 자체, 그리고 더 의미 있는 일을 즐기면 된다.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지속적으로 존재 가능한 이유도 철저한 법 집행력에 있다. 시민운동인 '우리는 99%'도 지금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지만 그래도 그들의 건국이념인 자유와 평등이 지켜지는 이유는 함께 느끼는 법의 존재감과 기업들의 사회적 역할이다. 일수벌금제나 징벌손배제 모두 불특정 대중의 자유를 위함이다. 상대적 불평등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대기업의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그래서 그나마 적정한 분배를 수행할 국가가 유일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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