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3% 성장, 독과 약의 경계

취임 이후 내내 호흡이 가빴던 문재인 정부에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것은 '뜻밖의' 성장세와 기업 실적 호조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한국 경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다. '귀한 손님'인 반도체 덕에 내리막길을 걷던 수출이 유턴하면서 마의 벽인 '3% 경제 성장'이 손에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다른 것은 몰라도 먹을 복은 타고난 사람"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올해는 IMF 외환 위기가 터진 지 꼭 20년이 되는 해다. 당시 정부와 기업, 금융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렸지만 김영삼 정부는 거시 경제지표를 들먹이며 '펀더멘털'만 외치다 중환자실로 실려갔다. 지금 눈높이로 따지면 외환 위기 직전인 1996년 7.6%, 1997년에 5.9% 성장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방심한 사이 외환 위기가 들이닥쳤고 그 이후 국민의 곤궁한 삶은 알려진 대로다. 1998년 성장률이 -5.5%로 곤두박질 친 것은 그 서막이었다.

한국 경제에 '구제금융'이라는 피주머니를 채운 외환 위기가 정부의 무능함이 초래한 급성질환이라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양상은 만성질환이다. 별 증상을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 체력이 떨어지고 상태가 나빠지는 꼴이어서다. 전문가들 사이에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가 우리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분기점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이때부터 한국의 성장세가 눈에 띄게 둔화하면서 OECD 국가 가운데 성장률 낙폭이 매우 큰 나라에 든다. 2001∼2008년까지 8년과 2009∼2016년까지 8년을 비교하면 우리의 평균 성장률이 4.6%에서 3.1%로 1.5%포인트나 떨어졌다. 2002년 7.4%의 경이적인 성장률은 그렇다 치더라도 2000년대 초반 4∼5%대와 지금의 2%대 성장률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외환 위기 때와 비교하면 지금 우리의 외환 보유액이 18.4배 늘고, 코스피 지수는 6.7배나 오르며 대외 건전성이나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크게 달라진 것은 맞다. 하지만 성장률이 2%대에 고정되고 넘쳐나는 가계 부채와 청년 실업, 저출산, 고령화 등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요인들이 즐비하다. IMF 때도 그러했듯 매의 눈은 이를 놓치지 않는다. 언제든 경제 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이유다.

그저께 한국은행은 7~9월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전기 대비 1.5% 성장했다고 발표했다. 분기 기준으로 2010년 2분기 1.7% 이후 7년 3개월 만에 최고치다. 4분기에 역성장해도 3년 만에 3%대 성장이 가능한 수치다. 정부와 집권 여당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까닭이다. 속으로는 요즘 유행하는 "그뤠잇"을 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화려한 반도체 잔치는 끝났다'는 불길한 소식에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기준금리도 6년 5개월 만에 다시 반등했다. 불안한 한반도 안보 상황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상수가 된 지 오래다. 당장 내년에 한국 경제가 어디로 튈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폭풍 전야와 같은 불안감이 국민 일상에 무겁게 와 닿는다.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 과제에는 새 정부 5년의 어젠다가 빼곡히 담겨 있다. 물론 100대 과제에 경중(輕重)이 없겠지만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는 16번째에 등장한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좋은 일자리 창출'이다. 좋은 일자리가 빈 바구니를 채우고 나아가 사회 안정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1, 제2 과제인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이나 '반부패 개혁으로 청렴한국 실현'과 비교해도 그 지향점이 같다.

미국 경제역사가인 데이비드 란데스는 '국가의 부와 빈곤'(1998년)에서 이상적인 성장과 발전을 위해 정부가 할 일을 정리했다. 한 대목을 보면 '효율적이며 세금을 낮추고 사회적 잉여에 대한 정부 몫을 줄이는 정부 구현'이 눈에 띈다. 문재인 정부가 실천하려는 정책 과제와도 맥락이 같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명분만 좇다 디테일을 놓친다면 죽도 밥도 모두 잃게 된다. 1997년과 2008년의 잘못을 내년에는 되풀이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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