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은 오묘하고 야릇한 맛을 가졌다. 본래 보들보들한 식감을 가진 굴이지만, 찬바람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 한층 더 탱글탱글한 기운이 더해지며 입맛을 자극한다. 뽀얀 속살의 알굴을 한입 물었을 때 입 안 가득 퍼지는 바다 내음은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돌게 만든다. 겨울철 굴은 달짝지근하게 혀에 감겨드는 맛까지 더욱 진해진다. '단짠'의 조화랄까. 첫맛은 소금기를 머금은 해산물 특유의 짠맛이지만 그 위로 달큰한 굴 특유의 향과 맛이 한가득 퍼져 나가며 입안을 가득 채운다. 특히 굴은 맛도 맛이지만 영양가 측면에서 워낙 탁월하다. 오죽하면 '바다의 우유'라는 별칭이 붙었을까.
굴 채취 시기는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이지만,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11월 말부터 1월 정도까지가 굴이 가장 차지고 맛있는 시기로 손꼽힌다.
그 바닥이 어딘지 모르고 자꾸만 떨어지는 기온에 몸이 움츠러드는 초겨울. 전국 굴 생산량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경남 통영으로 맛 기행을 떠나보자. 통영은 입이 즐겁고, 몸이 즐겁고, 볼거리가 많아 더욱 즐거운 겨울 여행지다.
◆굴 요리의 모든 것, 통영에서 맛보다
일단 겨울철 통영을 찾았으면 향긋한 굴 맛부터 봐야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 않던가. 입소문 난 굴 전문 음식점을 수소문해 이른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좀 이른 시간이라 '첫 손님이지 않을까' 머쓱해하며 문을 열었더니, 이미 식당 안은 한창 식사를 즐기고 있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역시 이름난 맛집답다.
굴을 재료로 한 요리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는 1인당 3만원짜리 '굴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신선한 생굴에서부터, 찐 각굴(석화), 굴무침, 굴탕수육, 굴조림, 굴전, 굴밥, 굴어묵까지 그야말로 굴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요리가 한 상 가득 차려졌다. 모든 음식이 주문과 함께 갓 조리돼 나와 더욱 식욕을 자극했다. 부침가루를 쓰지 않고 계란만으로 노릇하게 부쳐낸 굴전과 바삭하게 튀겨진 굴튀김에 달짝지근한 소스를 곁들인 굴탕수육은 아이들의 입맛까지도 충분히 사로잡을 것 같았다.
특히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메인 요리는 '굴 삼겹살 구이'다. 불판에 일렬로 가지런하게 줄 선 굴과 삼겹살, 그리고 김치와 콩나물까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온다. 자글자글 익어갈 즈음, 모든 재료를 한데 섞어 양념이 고루 섞이게 한 뒤 상추나 깻잎에 쌈을 싸 먹으면 된다. 한마음식당 제순옥 대표는 "굴 하나로만도 충분히 매력적인 맛이지만, 이것을 보다 풍성하게 즐길 방법을 고민하다 굴 삼겹살 구이를 개발하게 됐다"고 했다.
통영의 굴 전문점은 주로 중앙시장 인근에 많이 자리 잡고 있다. 굴 삼겹살 구이로 유명한 '한마음식당' 외에도, 매콤한 굴 두루치기로 유명한 '통영식도락', 왕굴그라탱과 굴 피자를 선보이는 'THE 통영피자' 등 자신만의 특색 있는 메뉴를 내세운 다양한 굴 맛집들이 즐비하다. 워낙 굴이 지천인 통영이기 때문에 어딜 가든 신선함 하나는 보장돼 있다.
◆노련한 손맛으로 발라낸 굴
배도 든든히 채웠으니 이제 찬바람을 좀 맞아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먼저 굴이 어떻게 생산되고 판매되는지가 궁금해 통영 굴수협을 찾았다. 때마침 낮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얀 플라스틱 박스 안에 탱글탱글한 속살을 드러낸 뽀얀 알굴이 그득 담겨 있었다. 알아듣기 힘든 낯선 억양으로 연신 "잡~아~~~~~!"를 외치는 경매사의 진행에 따라 중매인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올해 굴은 예년에 비해 알이 빨리 차고 성장속도가 빨라, 생산량도 지난해보다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굴수협 관계자는 "굴이 가장 맛있고 향이 좋을 때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 점점 추워지는 11월에서 12월 사이이고, 글리코겐이 가득 축적돼 영양가가 최고에 달하는 것은 1, 2월 무렵"이라며 "우리나라는 작은 굴을 선호하기 때문에 12월까지가 가장 가격대가 높게 형성되고, 1월부터 생산되는 굴은 알이 크기 때문에 수출용으로 많이 판매된다"고 설명했다.
경매장 가득 쌓인 알굴을 보니 껍데기에 둘러싸인 석화가 궁금해져 인근에 위치한 박신장을 찾았다. 보통 바다에서 채취한 굴은 곧장 박신장으로 옮겨져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껍데기를 까고 속알만 발라내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딱딱한 껍데기 사이에서 탱글탱글한 생굴만 쏙 건져내는 이 작업을 '굴 박신작업'이라고 부른다.
330㎡(100평) 가까이 되는 넓은 박신장에는 중년의 아주머니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수십 명이 굴 까기에 여념이 없었다. 작업대 위에는 그 양을 가늠할 수 없는 '굴 산'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다들 워낙 오랜 세월 굴 까기 작업을 하다 보니 어느 누구 하나 '달인' 아닌 사람이 없다. 과도를 껍데기 사이로 쓰윽 밀어 넣자 금세 입을 앙다물고 있던 굴이 속살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칼을 쓰윽 긋자 껍데기와 분리된 알굴만이 쏙 통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30년을 굴을 깠다는 한 할머니는 "달인 같다"는 기자의 칭찬에 "내야 이제 늙어가 손이 느리다카이. 저 짝에 젊은 아지매한테 가봐라. 정말 신통할 정도로 빠르다 아이가"라며 손사래를 치신다.
멀리 대구에서 취재 왔다는 소개에 주름 가득한 어르신의 만면에 미소가 번지며 갓 깐 굴을 연신 입에 넣어주신다. "싸주지는 못해도 여기서 묵을 만큼은 실컷 묵고 가야제"라는 어르신의 말에 굴 향만큼이나 짙은 정이 뚝뚝 묻어난다. 작업장에서 맛보는 굴은 식당에서 먹는 굴보다 몇 배는 짠 대신, 몇 배는 신선하다. 아직 세척 과정을 거치지 않아 바닷물 그대로 짠내가 진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맛있고 즐거운 여행지 통영
통영에는 제철을 맞은 굴 외에도 맛있는 먹거리들이 즐비하다.
그중 최근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꿀빵이다. 꿀빵은 통영식 디저트로, 팥 앙금이 든 빵을 튀겨낸 후 꿀에 버무린 것이다. 팥뿐 아니라 호박과 자색 고구마 앙금이 들어 있는 다양한 맛의 꿀빵이 있어 골라 먹는 재미도 있다. 원조라고 알려진 '오미사 꿀빵'과 네티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나폴리 꿀빵'이 유명하다.
'충무김밥'의 탄생지도 통영이다. 통영의 옛 명칭이 '충무'인 것이다. 김밥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김밥과는 상당히 다른 음식이다. 김에 만 밥에 갑오징어와 무 무침을 반찬처럼 곁들여 먹는 것이 충무김밥이다. 여름철 밥의 변질을 방지하기 위해 밥과 반찬을 분리해 먹게 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원래는 주꾸미를 사용했다고 하지만, 요즘은 오징어를 사용한다.
빼떼기죽도 통영만의 명물이다. 먹을거리가 충분하지 않던 옛날, 간식의 하나로 생고구마나 삶은 고구마를 얇게 썰어 볕에 말려 먹었는데 이를 경상도에서는 '빼떼기'라고 불렀다. 말리는 과정에서 고구마의 수분이 증발하면 얇게 썰어놓은 고구마가 비틀어지는 모습에서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끼니를 때우기 힘든 겨울철에는 이 빼떼기를 넣고 죽으로 끓여 먹기도 했는데, 이것이 통영의 이색 먹거리이자 웰빙 식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통영 먹거리 투어를 즐기고 싶다면 통영항 인근의 중앙시장과 서호시장을 찾으면 된다. 신선한 해산물도 그득하다. 맛집 투어를 즐기다 너무 배가 부르다면 인근 동피랑과 서피랑 마을에 올라 아기자기한 벽화 마을을 감상해도 좋다.
또 다리 건너 미륵산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를 타거나, 전 세계 6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스카이라인 루지(LUGE)'를 체험해 봐도 배가 금방 꺼진다. 루지는 특별한 동력장치 없이 특수 제작된 카트를 타고 땅의 경사와 중력만을 이용해 트랙을 달리는 놀이시설로, 최근 통영의 가장 핫한 관광명소로 급부상했다.
TIP
▶통영에서는 수하식으로 굴을 키운다. 바다에 부표를 띄우고 그 아래에 굴을 붙인 조가비를 길게 늘어뜨려 굴을 키우는 방식으로 대량 생산을 위한 것이다.
▶카사노바와 나폴레옹, 클레오파트라의 공통점은 '굴 마니아'라는 점이다. 카사노바는 매일 아침 생굴 50개를 먹고 연인과 사랑을 나누었다고 하고, 나폴레옹은 전쟁터에서도 끼니 때마다 굴을 찾았다고 전해진다. 피부 관리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클레오파트라 역시 굴을 즐겨 먹었다.
▶굴은 영양의 보고다. 아연이 풍부한 것은 물론이고, 비타민, 타우린, 칼슘, 요오드도 가득하다. 굴에 포함된 아연은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분비와 정자 생성을 촉진한다. 정력에 좋다고 알려진 이유다. 굴 속 글리코겐 역시 췌장에 부담을 주지 않는 에너지원이기 때문에 스태미나 증진에 좋다. 또 칼로리와 지방 함량이 적어 다이어트에도 적합하다. 칼슘이 풍부하기 때문에 식이 조절 과정에서 부족해지기 쉬운 칼슘을 보충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철분은 물론 구리도 함유돼 있어 빈혈에 좋고, 타우린이 많아 콜레스테롤을 내리거나 혈압 저하 작용에도 도움이 된다.
▶굴은 양쪽에 껍데기가 다 있는 것을 각굴, 한쪽만 있는 것을 반각굴이라 부른다. 굴을 고를 때 각굴의 껍데기가 메마른 것은 피해야 한다, 또 껍데기를 깐 알굴의 경우 속살이 하얀 우윳빛에 광택을 띠는 것이 좋다. 만약 속살의 색이 어둡거나 노란색으로 변했다면 식중독에 걸리기 쉬운 상태로 보고 피해야 한다.
▶'보리가 피면 굴을 먹지 말라'는 옛말이 있다. 서양에서는 각 달의 명칭에 'R'이 들어가면 굴을 먹어도 좋고, 그렇지 않으면 주의해야 한다고 전해진다. 그러니까 'R'이 들어가지 않는 5~8월은 굴 섭취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때는 굴이 산란을 하는 시기로 '베네르빈'이라는 독소가 방출되기 때문이다.
▶굴의 제철은 겨울로 알려져 흔히 생굴로도 많이 섭취하지만, 겨울철에도 노로바이러스로 인한 식중독 위험이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노로바이러스는 추위에도 강하기 때문이다. 생굴로 섭취하려면 흐르는 물에 여러 차례 굴을 깨끗이 씻어야 하며, 손을 깨끗이 씻고 섭취해야 한다. 가급적 익혀 먹는 편이 안전하다.
▶굴을 날것으로 먹을 때는 레몬즙을 곁들여 먹으면 좋다. 비린 맛을 없앨 뿐 아니라 레몬의 강한 산이 굴이 쉽게 부패하는 것을 막는다. 또 레몬에 풍부한 비타민C는 굴의 철분이 체내에 잘 흡수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굴을 세척할 때는 천일염을 적당량 넣어 잘 녹여준 후 굴을 넣고 살살 헹궈줘야 한다. 무를 활용하면 더 좋다. 강판에 간 무즙에 굴을 넣고 잘 섞어 10분 정도 놓아두었다가 맑은 물로 가볍게 헹구면 굴에 붙어 있던 이물질이 잘 제거된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