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태필봉' 명당 윤봉길 유적지
중국 망명때까지 머물며 항일
절 없애고 조성한 남연군묘
희귀한 '남은들 상여' 전시돼
사회활동 앞장 신여성 일엽
'수도사의 여승' 노래로 유명
예산은 서쪽 가야산이 서해 바다의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고 무한천과 삽교천이 만든 가야산 자락의 내포땅(가야산 자락의 10개 고을)이다. 예산은 너른 예당평야의 풍요로움과 넉넉한 인심이 넘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 윤봉길 의사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한 예향(禮鄕)의 고장이다.
'예산 가서 옷 잘 입는 체하지 말고 홍성 가서 말 잘하는 체하지 말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듯이, 예산은 예부터 아산만을 통한 수로가 발달한 교역의 중심지였다. 덕산면에 있었던 예덕 상무사가 상거래가 매우 활발했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임존성, 예당호, 삽교평야, 가야산, 황새공원, 덕산온천 등 예산의 많은 볼거리가 있지만 오늘은 가야산 남연군묘, 충의사, 수덕사로 이른 겨울여행을 떠난다.
◆매헌(梅軒) 윤봉길의 유적지
덕산온천이 있는 덕산면 시량리에는 윤봉길 의사의 유적지가 한곳에 모여 있다.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두 물길이 만나서 배 모양의 형국인 도중도(島中島)에서 1908년 태어났다. 이곳 생가에는 '빛이 나타나는 곳'이라는 뜻의 광현당(光顯堂) 당호가 붙어 있고 아늑하고 포근한 초가집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윤봉길 의사가 네 살 무렵 '한국을 건져 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狙韓堂)으로 옮겨와서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민족운동을 하던 곳이다. 이곳은 풍수적으로 지사나 유학자가 나올 터라는 삼태필봉(三台筆峰: 덕숭산의 세 봉우리가 붓끝처럼 솟아오른 모습) 형국의 명당이라고 한다.
윤봉길의 본명은 우의이고 봉길은 별명이다. 매헌은 아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에게 지기 싫어해 싸워서 진 적이 없었다. 씨름에서 지는 날이면 하루 종일 맞붙어서 이길 때까지 붙들고 늘어졌으므로 별명이 '살쾡이'였다고 한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학교를 자퇴하고 사숙에서 한학을 배웠다는 일화도 전해 온다. 19세가 되자 윤봉길은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야학을 열고 '농민독본'을 손수 만들었고 자활적 농촌진흥단체인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부흥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 국내 활동이 어려워진 그는 23세에 '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 生不還)라는 비장한 글을 남기고 만주로 망명했다. 1931년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에게 독립운동에 몸 바칠 것을 다짐하고 마침내 1932년 4월 29일 일본인들이 천왕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기념행사 중에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거행했다. 채소상으로 변장한 그는 도시락 폭탄을 던져 상해사령관 시가가와를 죽이고 축제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당시 중국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중공군 백만 대군이 못하는 일을 했다'며 애국 청년 윤봉길의 용맹스러움을 칭찬했다. 거사 직후 일본으로 호송되어 그해 12월 19일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죽임을 당했다.
유적지 관람은 충의사, 김구 선생과 바꾼 회중시계가 보관된 윤봉길기념관, 저한당, 광현당으로 동선을 잡으면 된다. 입장료는 없으며 주차공간은 넉넉하다.
◆남연군묘
덕산읍에서 약 5㎞ 떨어진 가야산 속에는 고종황제의 조부이며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가 있다. 이 무덤은 주산을 석문봉, 옥양봉, 만경봉을 좌청룡으로 가사봉, 가엽봉, 원효봉을 우백호로 봉수산을 안산으로 둔, 풍수지리적으로는 명당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옥녀폭포와 백호맥의 가사봉 계곡물이 와룡담에 모였다 굽이쳐 흐르는 곳이다.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라 하여 흥선대원군은 흔쾌히 터를 잡았다고 한다.
원래 이곳에는 가야사란 절이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을 주지에게 주어 스님들을 쫓아내고 불을 질렀다고도 하고, 마곡사 스님들을 불려다 강압하여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전한다.
절집을 폐허로 만든 뒤 탑을 헐기 전날 밤에는 흥선대원군 네 형제가 똑같은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꿈에 수염이 흰 노인이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만약 일을 벌인다면 네 형제는 폭사할 것이다'라고 했다. 흥선대원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다면 이곳이 진정 명당자리다'라며 1845년 아버지 묘소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뒷날 도굴을 염려하여 철 수만 근을 붓고 강회를 비벼 넣어 봉분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이다. 무덤에서 바라보는 풍광 또한 일품이다. 무덤 옆에는 요즈음 보기 쉽지 않은 남은들 상여가 전시되어 있다. 입장료는 없으며 대형버스 승객들은 상가리 버스정류장 인근에 주차하고 걸어서 가야 한다.
◆수덕사와 수덕여관
'수덕사의 여승'으로 많이 알려진 수덕사는 덕숭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백제 위덕왕 때 숭제 법사가 창건하고 통일신라 때 원효가 중수했다. 이후 한말 경허 스님이 선풍을 크게 일으키고 제자 만경 스님이 중창하고 일엽 스님에 의해 널리 알려진 유서 깊은 사찰이다. 영축총림 양산 통도사, 해인총림 합천 해인사, 조계총림 순천 송광사, 고불총림 장성 백양사, 쌍계총림 하동 쌍계사, 팔공총림 대구 동화사, 금정총림 부산 금정사와 더불어 덕숭총림 예산 수덕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대한조계종 8대 총림 중 한 곳이다.
수덕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남향이며 맞배지붕에 11량(도리가 11개)의 넓은 지붕에 배흘림기둥이 있다. 규모가 크면서도 단아한 국보 제49호이다. 고려 말 1308년에 세워진 건물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라고 한다. 1937년 해체 수리 때 중수 연대가 적힌 붓글씨가 발견되면서 건립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대웅전 왼편 1080 돌계단을 오르면 소림초당, 관음보살입상, 정혜사(능인서원)까지의 옛스러운 산길과 뒤돌아보는 전경이 멋지다.
내려오는 길에는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 일엽(逸葉, 1891~1971)이 수도하던 견성암과 환희대가 있다. 일엽은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한 신여성으로 대담한 행동과 필설로 유명한 여성 사회활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1962년에 발표한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가 유명하고 '수덕사의 여승' 노래가 발매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원래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1933년 수덕사에 입산하여 만공의 제자가 되어 수덕사에 머물렀다.
수덕사 일주문 왼편에는 고암 이응로(顧菴 李應魯, 1904~1989) 화백이 작품 활동을 하던 수덕여관이 있다. 6'25전쟁 때에는 피란처로 사용했으며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었던 곳이다. 여관 뒤뜰 바위에는 그림인지 글씨인지 잘 알아보지 못하는 암각화가 조각되어 있다. 이 화백이 1960년대에 문자추상에 심취하여 한글 자모들을 풀어서 쓴 글로 서로 엉키면서도 부드럽게 풀려가는 듯 조화를 이루고 있다.
수덕사 입장료는 어른 3천원이다. 주차공간은 여유 있으며 주차 후 수덕사 가는 길에는 다양한 메뉴의 큰 식당이 여러 곳 있다.
♥Tip
*가는 길: 대구→경부고속도→대전→영덕당진고속도→예산IC→충의사(소요시간 약 2시간 30분)
*한국고건축박물관: 수덕사 인근에 있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우리 고건축 분야의 의미와 가치를 전달하고자 설립된 이 박물관은 전국에 산재한 국·보물급 고건축 문화재를 제작 전시하고 있다. 국보 제1호 숭례문, 부석사 조사당, 봉정사 대웅전 등의 축소 모형도 있다. 월요일은 휴관이며 041)337-5877, 홈페이지(www.ktam.or.kr)로 예약 가능하다.
*예당호 중앙생태공원: 2009년 3월에 조성되었다. 전망대, 조망대, 파고라가 설치되어 있어 가족, 연인이 많이 찾는다. 예당관광지관리사무소 041)339-8281.
*입질네 어죽식당: 충의사에서 수덕사 가는 길 왼편에 있다. 묵은김치, 열무김치, 노란무의 단출한 기본 반찬에 인근 시냇물에서 잡은 민물 잡어로 만든 어죽은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으면서 향긋한 맛은 먹을수록 입에 당긴다. 1인분 7천원(041-337-5989). 인근에 어죽집이 몇 곳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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