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5)
"참 이상하지? 당신을 생각하면 밤새워 일을 해도 잠을 못 자도 안 피곤해"라는 말, 혹은 비슷한 말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어렵지 않게 들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직접 들었거나 해본 말일 수도 있다. 사랑의 힘을 아주 쉽게, 아주 일상적으로 설명해 주는 말이 아닐까? '에로스의 종말'은 이러한 위력을 가진 사랑이 오늘날 여러 요소로 인해 위협받고 있음을 설파해 놓은 책이다.
'피로사회'로 잘 알려진 저자 한병철은 한국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독일에서 철학과 문학, 신학을 공부했으며, 2010년과 2012년에 각각 출간한 '피로사회' 와 '투명사회'가 독일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가장 주목받는 문화비평가로 떠오른 그가 '에로스의 종말'을 일곱 개의 장으로 나누어 진단했다.
1장에서 저자는 에로스와 우울증의 대립적 관계를 꿰뚫는다. 에로스는 자신의 주체를 타자를 향해 내던지는 반면, 우울증은 자기 속으로 주체를 추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멜랑콜리아'를 예로 들며, "에로스는 우울증을 제압한다"(22쪽)고 규정한다. 주체를 깨뜨리는 완전한 타자의 침입이라는 파국적 재난이 뜻하지 않은 구원으로 연결됨을 말한다.
2장과 3장에서는 자본과 생산성이 무엇보다 중시되는 사회에서 에로스를 품지 못하는 현대인을 느낄 수 있다. "할 수 있음이 지배하는 성과사회,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 주도권과 프로젝트가 전부인 사회는 상처와 고뇌로서의 사랑에 접근하지 못하"(44쪽)고, "벌거벗은 삶을 지키려는 경향은 더욱 첨예화되어 건강의 절대화와 물신화로 치닫고 있"(53쪽)다고 파악하고 있다.
4장과 5장은 "그저 따뜻함, 친밀함, 안락한 자극을 넘어서지 않는 오늘의 사랑은 신성한 에로티즘이 파괴"(71쪽)된 포르노이며, 너무 많이 보여주는 과다한 정보로 인해 환상이 없다고 토로한다. 타자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므로 에로스도 소멸한다는 것이다. 6장 '에로스의 정치'는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84쪽)이 만나는 접점이 용기라고 언급한다.
7장은 엄청난 데이터의 활용으로 이론적 모델이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크리스 앤더슨의 '이론의 종말'에 대한 반박이다. 데이터가 동력인 사유란 존재하지 않고,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담론은 그 자체가 에로틱한 유혹이라 한다. "에로스의 힘을 동반하지 못하는 로고스는 무기력하다"(96쪽)는 말로 에로스가 사유에 미치는 절대적 영향력을 피력한다.
철학서는 어렵다. 그러나 익숙하던 인식의 겉가죽을 한 꺼풀 들추어보는 것은 한 해의 끝자락에서 해볼 만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저명한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서문을 보탠다. 그는 '한병철의 주목할 만한 에세이를 읽는 것은 고도의 지적 경험이며, 그것은 사랑의 수호, 혹은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에 명확한 의식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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