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원칙 지키는 굴 가게 주인
남도 가족처럼 대하는 서비스
사회 전체가 정직에 대한 믿음
웃으며 인사하는 일도 많아져
덴마크 코펜하겐의 어물전에서 굴을 처음 발견했을 때 섬진강의 석화가 생각나 속없이 반가웠다. 즉석에서 가른 굴을 얼음 가득한 용기에 레몬 조각과 함께 판매하는 것을 보고 비싼 값을 각오하고 몇 개를 주문했다.
언제 먹을 것이냐는 점원의 질문에 두어 시간 후 저녁식사용이라고 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안 팔아요. 굴을 깐 지 30분 안에 먹어야 해!" 집이 10분 거리이니 얼음 포장째 바로 냉장보관하면 되지 않느냐 설명했지만 결국 거절당했다. 까다롭게 구는 상인들이 얄미웠지만 당장 돈벌이보다 최상의 품질 거래를 고집하는 이들에게 믿음이 갔다.
코펜하겐의 가게들은 신뢰를 판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식재료라면 대충 씻거나 먼지만 털어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고, 생수병에는 '개봉 후 5℃ 이하 냉장고에서 이틀간 보관'이라는 문구가 친절하다. 평일 아침 7시면 빵집들은 문을 열고 신선한 제품으로 출근 손님들을 맞이하기 시작한다. 집안에 필요한 소소한 상품들은 편리한 아이디어로 번뜩이고 6년 전 이곳에서 구입한 욕실 슬리퍼는 부모님 댁에서 아직 말짱하다.
신뢰가 기반이 되면 사람 대하는 모습도 달라진다. 복잡한 공항 카페에서 노트북 컴퓨터에 신용카드까지 훤히 올려다 놓은 채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는 사람을 볼 수 있고, 가게 점원이 손님인 나만 남겨놓고 지하창고에 물건을 가지러 가는 통에 한참 동안 본의 아니게 가게를 지켜줄 때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일상의 신뢰는 다시 제도로 확장된다.
북유럽인들이 높은 세율을 기꺼이 부담하는 이유는 정부가 내 돈을 가져가서 필요한 곳에 제대로 써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사람들은 경찰, 공공기관, 의회와 정치 체제가 나를 위해 어려운 일을 대신 해줄 것이라 기대하고 제도는 이를 배반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인터뷰한 북유럽인 가운데 높은 세 부담 자체에 불만을 가진 이들은 의외로 적었다. 무임승차로 인한 부담 증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높은 세율에 기반한 보편적 사회보장제도에는 기본적으로 강한 믿음을 보였다. 세금을 내기 때문에 정부와 공공기관을 더 많이 간섭하고 감시할 수 있지 않느냐는 논리에는 납세자의 당당함이 느껴졌다.
북유럽의 모범적인 사회 신뢰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까. 아프리카, 중동 등 비서구권 출신의 이민자가 급증하고 있는데 이들이 북유럽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시민가치와 융화 내지 공존할 수 있을까.
위기를 인정하면서도 의외로 이곳 사람들은 미래에 낙관적이다. 이민 급증이 불안하기는 하지만, '태생적 북유럽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신화에 불과하며, 북유럽은 이미 수백 년간 이민을 통해 이질적 문화를 통합해왔다는 설명은 일반인으로부터도 쉽게 들을 수 있다. 이민 후세대가 얼마나 잘 동화되고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해왔는지에 대한 믿음은 구체적이고 확고하다. 최근의 이민자들에 대해서도, 자국 정치의 혼란과 그로 인한 어려움을 아프게 경험했던 만큼 오히려 강한 생활 의지로 북유럽의 자산이 되지 않겠느냐는 옹호론이 상당하다.
신뢰는 '사회적 자본'이라는 전문 용어로 지칭되며 다양한 사회·경제 관점에서 연구되어 왔다. 사회 신뢰가 10% 높아지면 경제성장률이 0.5%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오르후스 대학팀의 연구도 있지만 요즘처럼 정보의 흐름이 빠르고 경쟁이 치열한 세계 시장에서는 기본적인 신뢰가 결여된 얄팍한 상술이나 형식적인 제도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
코펜하겐 굴 장수의 고집스러운 30분 가이드라인은 의외로 쉬운 곳에 해결책이 있음을 보여준다. 나와 가족을 위한 것인 양 타인을 위해서도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공급한다는 원칙, 규정이 있으면 지켜야 하고 편법으로 무리한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상식, 복잡한 계산 없이 내가 정직한 만큼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 이에 더하여, 이민자들에 대한 이곳 보통 사람들의 시각처럼 나와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멀리 보고 기다려주는 이해까지 더해진다면, 사는 것이 좀 더 쉽고 편안하고, 인사를 건네며 웃는 일이 많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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