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합의'가 나쁜 걸 누가 모르나

"전쟁이 시작되고 불과 25일밖에 안 지났지만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3월 말까지는 전쟁의 1단계를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도 무리는 없게 됐다.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일본이 진주만 기습과 함께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와 서태평양으로 진격했던 다음 해인 1942년 첫날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宇垣纏)의 일기다. 연합함대는 일본의 핵심 전력이다. 그 참모장이란 사람이 1단계 전쟁 목표를 달성한 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본은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라는 장기 비전 없이 개전(開戰)을 결정했다는 얘기다.

개전은 극히 근시안적 동기로 결정됐다. 그것은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응한 미국의 석유 금수(禁輸) 조치다. 이에 따라 18개월 뒤면 연합함대는 고철 덩어리로 전락할 터였다. 그렇다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그만둘 생각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군부는 앉아서 망하기보다는 차라리 먼저 공격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선공(先攻)이 성공해도 장기전으로 갔을 경우 어떻게 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당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도 1943년 이후에도 전쟁이 계속될 경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 개전은 '일단 저지른 다음 뒷일은 그때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불인정' 천명은 이와 똑같은 무모함을 보여준다. 이제 문재인 정부의 선택지는 '합의 파기'와 '재협상' 두 가지뿐이다. 문제는 그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 마땅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합의 파기는 한일 관계의 파국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게 됐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래도 잘 지내보자'는 것뿐이다. 일본이 잘도 '그러자'고 하겠다. 재협상은? 일본이 '최종적'불가역적 합의였다'며 거부하면 그만이다. 이미 아베 총리는 "1㎜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제3의 선택지도 있다. 2014년 아베 정권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군의 관여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검증'한 뒤 "담화는 한일 간 정치적 흥정이었다. 그럼에도 계승한다"는 저질 코미디를 했던 것처럼 "합의를 인정할 수 없지만, 한일관계 경색을 고려해 유지한다"고 미봉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여론의 반발 때문에 쉽게 선택할 수 없고, 선택하더라도 오래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합의'가 나쁜 것임은 명백하다.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불인정'하여 '파기'하거나 '재협상'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만이 문제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합의'는 북핵에 대응한 한미일 공조라는 안보 문제와 '엮여' 있다. 우리의 의사에 상관없이 그렇게 돼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을 내세우며 완강히 버티다 결국 미국의 '합의' 중재를 수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 전 대통령인들 이 결정이 국내 여론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올 것임을 왜 몰랐겠나?

안보 상황은 '합의' 당시보다 더 위중해졌다. 북한의 핵무장 완성까지 3개월밖에 안 남았다는 게 미 CIA의 판단이다. 한미일 공조의 필요성은 그만큼 더 절실해졌다. '합의' 불인정은 의도했든 안 했든 이와 반대로 가겠다는 것이다. 왜 하필 이런 위중한 시기에 그런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다. '국내정치용' 말고는 이유를 달리 헤아리기 어렵다.

'합의'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음을 누가 모르나. 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대통령이기에 대중과 같은 도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도자로서 정치세계가 요구하는 '다른 도덕'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행위자의 현명치 못한 행동은 설사 그것이 좋은 의도에서 행해졌어도 국가와 국민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정치의 법칙을 경멸하는 도덕적 오만으로 자신이 돌봐야 할 국가의 이익을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비난받아 마땅하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한스 모겐소의 말이다. 공부 좀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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