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을 생업의 밑천으로 삼아, 출처 불명 저작자 불명의 가담항설을 푹푹 퍼다가 쓰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어떤 시기에든 '불량 자원'과 부닥치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험을 하곤 했다. 가령 지난 세기의 1980년대 후반, 직장 생활을 하는 중에 한여름에 동료들과 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들었던 "냉면 먹고 돌아서자마자 육수가 뚝뚝 떨어지네, 비싼 점심 헛먹었구만" 같은 말에서 '육수' 같은 것. 상황에 맞는 적실한 표현 같긴 한데 그 말을 하는 사람을 인생 선배로 존경할 수 없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 뒤에도 식당에 가서 '육수를 뚝뚝 떨어뜨리면서 육수가 든 음식을 먹을 때'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음식을 먹고 나와서 땀을 닦을 때마다 '육수'라는 단어와 그 단어를 썼던 선배의 얼굴이 생각나서 괴로웠다. 인간의 말이란, 인류의 언어란 시대의 유행을 반영하기 마련이어서 '동공의 지진'처럼 개성과 의도성이 있는 표현을 포함해 유행어가 잘잘못이라는 평가를 받을 이유는 없다. 장발이나 청바지, 통기타 문화가 탄압을 받는 것이 어불성설인 것처럼.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2000년대에 들면서 콘텐츠, 트렌드, 거버넌스 같은 영어 표현이 불편하게 들렸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어느새 그런 단어를 조금씩 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 쓰려고 어지간히 '발악'을 하여도. 발악은 고등학교 때 어느 선생님에게 '미치고 팔짝 뛰겠다'와 함께 배운 단어로서 '한심한 너희를 볼 때마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 너희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소용이 없지' 같은 용례로 쓰였다-사방에서 알 만한 사람이 써대니 '세 사람이 저자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三人成虎)는 옛말에 그른 게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고 쓰는 것과 모르고 따라 쓰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라 스스로를 위안했다.
십여 년 전부터 내게 자주, 불편하게 들린 단어는 '대박'으로 '통일 대박'에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이든 아이돌의 입에서든 알 만한 학자의 입에서든 대박은 스스럼없이 튀어나와 대박 그 자체에 낯가림하는 나 자신을 '꼰대'로 생각하게 만들 뻔했다.
가장 최근의 불편은 이른바 '급식체'에서 오고 있다. '오지다, 지리다, ~하는 각, 야민정음' 등등의, 내게는 넘어갈 수 없는 강 너머의 언어와 흉내도 소통도 불가한 것 같은 데서 마음이 편치 않다. 분명히 내가 일용할 당대의 한국어임에도 내가 가져다 쓸 수 없다? 이건 믿기지 않는 '실화'다. 물론 유행어는 소용이 끝나고 나면 봄눈 녹듯 스러져 버릴 것이고 그중 몇몇은 살아남아 그게 유행했던 시절을 함께 보냈던 사람들의 감성과 추억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어떤 말이나 글도 그게 영원한 전범으로 남을 것이라는 믿음은 내게 전혀 없다.
바로크의 원어는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포르투갈어이다. 16, 17세기의 유럽 건축미술의 한 특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장르와 시대에 한정하지 않고 어느 시대의 예술이든지 그 비슷한 특징이 나타나면 이를 가리켜 '바로크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로크풍은 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인 질서와 균형, 조화와 논리성과 달리 우연과 자유분방함, 기괴한 양상 등이 강조된 예술 양식이면서도 최소한의 질서와 논리가 유지되기 때문에 시대를 뛰어넘는 총체적 미감에 접속될 수 있었다. 비발디, 바흐, 헨델, 세르반테스, 몰리에르가 이 범주에 드는 작가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돈키호테는 아직까지 우리 곁에 여기저기 남아 있다. 우리 시대의 무엇이, 특히 언어와 예술과 발명품, 예능 중 그 무엇이 앞으로 십 년, 아니 단 일 년을 살아남을 것인지 나는 궁금해서 '발광'해 버리겠다. 그걸 안다면 떼부자 되는 건 일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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