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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한라산 정상에 올라

박영순
박영순

작년 삼월이었다. 봄이 되자 꼭 오르고 싶었던 한라산 등반을 하기로 했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그 산을 정복하고 싶었다. 백록담도 내 눈으로 보고팠다. 제주도를 여러 번 다녀왔지만 늘 한라산 아래 언저리에서 놀다 왔다. 한라산을 못 올라가 본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2박 3일의 일정을 잡고 제주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첫날은 마라도를 돌며 나름 체력을 보강했다. 둘째 날, 아침 7시부터 한라산 산행을 시작하였다. 계속 완만한 산길이라 콧노래를 불렀다. 해넘이까지는 산에서 내려와야 한다. 등산객들의 안전상 규칙이라니 모두가 지켜야 하는 일이다. 하산 시간을 맞추려면 오르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만 내려오는 길이 편할 것 같았다. 위로 오를수록 응달은 아직 눈들로 덮여 있었다. 질펀한 얼음길도 용감한 병사처럼 밟고 지나갔다. 소원 하나 이루어진다는 설렘에 등산화 끈을 꼭꼭 묶으며 오로지 정상만을 향했다.

그러나 그 완만한 길이 나의 체력을 소진시킬 줄 몰랐다. 다리가 붓고 뻐근하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한라산 정상에 도착하여 백록담을 내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감격의 환호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백록담의 물은 호수의 절반이 조금 못 되게 얕게 깔렸었다. 화산이라 현무암 탓에 눈이 녹지 않고 얼어붙어 볼 수 있는 행운이었다.

숨 가쁘게 오른 정상에서 생각에 잠겼다. 이 완만한 등산길이 내 인생이라면 어떠했을까. 오르기만 하고 내려가는 길 없는 산길이 힘겨울 줄 몰랐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어야 덜 힘든 삶이 아닐까. 인생도 이처럼 오르고 내리는 작은 고개가 있어야 만이 진정 즐거운 삶이려니 했다. 그렇다고 굴곡진 험한 삶을 살고픈 건 아니다. 정상을 향해 한 번의 내리막도 없이 전진하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힘든 것인지 체험했던 것이다.

인생길도 나아감만이 최상의 요건이 아니라는 것을. 내려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쓰다 보니 스트레스로 가득했을 삶을 알게 되었다. 조금 오르다가 조금 내려가고 또 올라가다 내려오는 길은 다리가 긴장되었다가도 풀린다. 이런 과정의 반복이라면 다리의 피로도가 훨씬 적었을 텐데, 한라산 등산길은 완만한 오름만이 있어 긴장만을 안고 올랐던 것이다. 적당한 오름과 내림이 있는 인생길을 걷고 싶다. 올라갔을 때 내려올 자신을 생각하고, 내려와 있을 때 올라갈 힘을 기르면서 내 삶의 위치를 잘 알아차리고 전진과 후진을 자유로이 할 수 있으리라. 한 번의 내리막길 없이 오르기만 한 사람들을 존경해 왔지만, 그날 이후로는 그들의 힘겨운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완만하게라도 오르기만 한 삶을 고집하지 않으련다. 내리막길에서 조금은 힘들고 고달플지라도 내게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넘어져도 일어나 나아가는 그런 삶의 등산길을 걸어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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