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지방분권, 워라밸로 가는 길

60대 중반의 택시 기사가 아들과 며느리 자랑을 시작했다. 명문대학 재학 중 선후배로 만나 결혼했고 경기도 동탄의 대기업에 나란히 근무하며 중견 간부의 지위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10년 넘게 근무하면서 일이 너무 많아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회사에 있어야 하는 생활이 이어진다고 했다. 육아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 하는 수 없이 조부모인 택시 기사 내외가 손자를 어릴 때부터 키워 포항에서 자랐으며 지금은 중학생이라고 했다.

아들 내외가 잘 된 건 좋지만, 자식과 어릴 때부터 떨어져 지내는 처지가 안쓰럽다고 대꾸했더니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사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라고 했다.

택시 기사의 아들 부부 이야기는 육아가 힘겨운 현실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맞벌이 부부가 자녀를 맡길 곳이 없어 근처에 사는 부모나 어린이집에 맡기고 퇴근과 함께 서둘러 찾아오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자녀를 아예 멀리 떨어진 부모에게 맡기고 주말이나 휴가 때 만나며 그러한 상황이 자녀의 중요한 성장기 내내 이어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사례이다. 맞벌이 부모가 평일 내내 밤늦게까지 회사 일에만 매달려야 하는 삶, 부모와 자녀가 성장기 내내 떨어져 지냄으로써 애착의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리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오늘날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고단한 직장 생활, 육아의 힘겨움, 손자녀 양육 등 사회적 문제를 겪고 있으며 이 때문에 결혼 기피 풍조가 생겨나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단어는 일과 삶의 균형을 바라는 사람들의 뜻을 담고 있다. 이 말이 한때의 유행어처럼 비치고 거창한 의제는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시대의 절박한 요청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한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을 주창했고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 삶의 개선을 최우선 국정 과제로 내세우면서 일자리 확대와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의 정책을 다시 강조했다. 좋은 일자리와 적정한 임금, 충분한 여가가 보장되는 삶이 행복의 전제조건이라면 아직 많은 국민이 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들이 나왔을 게다. 정부 정책들이 부정적 여파를 일으키고 이로 말미암아 사회적 파열음이 생겨나지만, 이해관계의 정교한 조정이나 노사정 대타협 등 슬기로운 해법을 통해 성공해야 한다.

'워라밸'은 지역적 편차가 크다. 서울이나 수도권에는 대체로 일자리가 많은 대신 경쟁이 치열하며 일에 치여 여가를 누릴 시간이 적다. 지방에는 일자리가 많지 않지만, 서울 등에 비해 경쟁이 덜하며 여가도 적지 않다. 또, 서울이나 수도권에는 공연장, 전시장 등 문화시설이 풍부한데 여가가 충분치 않다. 지방 사람들은 여가를 더 많이 갖고 있지만, 문화시설 등은 부족하다. 수도권과 지방 간의 심각한 불균형 현상은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시도 앞에서도 이율배반적인 현실의 장애물에 막혀 있다. 이에 비추어 지방분권은 지방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기반이면서 수도권과 지방이 서로 부족한 단점을 나눠 채움으로써 '워라밸'의 해법이 되는 묘안일 수 있다.

지방정부가 지금보다 더 풍부한 재정과 권한을 갖고 좋은 일자리와 문화시설 확충에 힘쓴다면 더 살기 좋은 곳이 되고 수도권 주민들을 고향으로 더 많이 돌아오게 할 수 있다. 지방분권개헌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자유한국당이 불확실한 정략적 의도로 개헌에 소극적이라면 저항에 직면할 것이고 시대의 요청을 외면한 불량 정치집단으로 낙인 찍힐 수 있음을 준엄하게 되새겨야 한다. 경북도지사 후보들은 지방분권을 염두에 둔 공약과 정책 개발에 나서야 한다. 살기 좋은 도시이면서도 여가를 누릴 문화적 여건이 부족한 포항, 안동, 구미, 경주 등은 물론 다른 시군지역 주민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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