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공직사회 여풍당당] 禁女의 벽 깬 '워킹맘 부서장' 야근 줄이고 육아휴직 장려

조직에 부는 변화 바람…폭탄주·과음 회식 줄고 가볍게 식사, 부드러운 조직문화 정착

대구 공직사회에 여성 공무원이 늘면서 조직문화 전반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남성 중심적이고 딱딱했던 조직문화가 수평적이고 부드러운 조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워킹맘' 공직자들이 부서장이 되는 사례가 늘면서 과음으로 연결되던 회식 문화가 가벼운 술자리나 공연 관람 등으로 바뀌는 등 '일'가정 양립'에도 긍정적인 신호가 감지된다.

◆술 대신 영화관, 뷔페… 달라지는 조직문화

박범우(57) 대구 중구청 기획예산실장은 지난해 부서 단합대회에서 '격세지감'을 느꼈다. 직원들의 의견을 모아 결정한 회식 장소가 영화관과 뷔페식 레스토랑이어서다. 박 실장은 "내가 공직에 입문한 1982년만 해도 회식을 하면 무조건 술을 마시고 마지막에는 다같이 화투를 쳤다"면서 "영화관과 뷔페가 '여성적 문화'라는 고정관념이 있어 처음엔 어색했지만 조직문화가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방증으로 본다"고 말했다.

공직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회식 문화다. 여성 공직자들이 대거 늘면서 수직적이고 남성적 회식 문화가 희석되고, 보다 유연하고 개개인의 취향에 맞춘 모임이 자리를 잡고 있다. 폭탄주와 과음으로 이어지던 회식은 점점 사라지고 패밀리레스토랑이나 맥줏집 등에서 가벼운 반주와 함께 음식을 즐기는 회식이 '대세'가 됐다. 연극이나 영화 등을 함께 관람하고 헤어지는 '문화향유형 회식'도 인기를 얻고 있다.

핵심 부서로 통하는 기획, 예산, 인사, 감사 등의 부서에도 여성 공무원의 진출이 늘었다. 중구청 개청 이후 처음으로 국장직에 오른 오순옥(59) 행정복지국장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기관 핵심 부서는 금녀(禁女)의 구역이었다"며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성을 살려 주민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등 장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 '일'가정 양립 문화' 정착에도 영향

여성 공직자의 증가는 공직사회에 일'가정 양립 문화가 폭넓게 확산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육아휴직과 출산휴가 등 가정 친화적 제도가 공직사회 전반에 정착되고, 야근을 줄이는 등 직원들이 보다 가정에 집중할 수 있는 문화가 확대되고 있는 것. 특히 부서장이 된 여성 공직자의 경우 가정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 부서원들도 눈치를 보지 않고 다양한 육아'출산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철수(57) 중구청 복지정책과장은 "예전에는 육아휴직이 아예 없었고 출산휴가도 두 달에 불과했는데, 이마저도 다 못 쓰고 한 달 만에 복귀하는 여직원이 많았다"면서 "아무래도 여성 공직자가 늘고 부서장직에도 많이 오르면서 좀 더 가정을 중시하는 문화로 바뀌는 것 같다"고 했다.

공무원들은 여성 공직자들이 일'가정 양립을 중요시하는 이유로 '경험'을 꼽았다. 박재홍(57'여) 대구 남구청 자치행정국장은 "여성 부서장들은 대부분 '워킹맘' 출신으로 일과 가정의 양립이 중요하다는 점을 뼈저리게 겪었다"면서 "여성 부서장은 직원들의 사생활을 배려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권장하고 술 문화'야근 강요가 거의 사라진다"고 말했다.

◆아직은 과도기, 갈등 요소들도 수면 위로

달라지는 조직문화 속에서 남녀 간 갈등 요소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여성 숙직제' 도입을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다. 대구시와 각 구'군은 안전 등을 이유로 남성 공무원으로만 야간 숙직근무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 공무원이 지속적으로 늘면서 숙직 근무 간격이 짧아지는 등 근무 여건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구시내 한 구청 공무원 A(46) 씨는 "운이 나쁘면 한 달에 두 번 이상 숙직근무를 선다. 하룻밤만 새워도 1주일은 피곤해 견디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이에 따라 여성 공무원들도 숙직 근무를 하는 지자체도 나타나고 있다. 부산 연제구청은 올해부터 여성 숙직제를 도입했고, 서울은 강남구와 영등포구 등 7개 구에서 여성 숙직제를 운영 중이다.

그러나 여성 숙직제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대구공무원노조 한 관계자는 "일'가정 양립을 고민한다면 여성 숙직제보다는 숙직 근무자의 수를 줄이는 게 합리적"이라며 "같이 근무하는 숙직 근무자 수를 절반으로 줄여도 공무원들의 부담이 훨씬 덜할 것"이라고 말했다.

몸을 써야 하는 현장 업무에 남성들만 투입되는 현실에 대한 볼멘소리도 나온다. 수성구의 동주민센터에 근무하는 박모(27) 씨는 "사무장이나 동장 등을 제외하면 주민센터의 남성 직원은 2, 3명뿐"이라며 "육체노동이 필요한 현장근무에 빠지지 않고 투입된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구청 관계자는 "최근 입직하는 공무원들은 여성이 더 많지만 현장에서는 육체노동이 가능한 남성 공무원을 선호해 일종의 '쟁탈전'까지 벌어지는 상황"이라고 푸념했다.

전문가들은 남성 중심적이던 공직사회가 양성친화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갈등이라고 진단한다. 남은주 대구여성회 상임대표는 "관례적으로 이어오던 시스템과 제도, 문화를 전면 재점검해야 한다. 가령 2명이 하던 일을 1명을 더 채용해 3명이 하도록 만드는 등 노동 부담을 줄이거나 숙직근무 자체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식"이라며 "여성 공무원들의 수가 늘어난다고 조직문화나 제도가 자연스럽게 바뀌진 않는다. 조직 전체가 적극적으로 제도와 문화를 바꿔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