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몰아치는 눈발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다. 황량하게 메마른 겨울 풍경은 사라지고 고운 솜털 이불을 덮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은 설국(雪國) 풍경이 펼쳐진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이 현실로 펼쳐진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눈발을 온몸으로 버티며 의연하게 서 있는 소나무. 그 사이로 한바탕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자 하얀 슈거파우더를 뿌린 듯 뽀오얀 눈가루가 안개처럼 흩날린다. 단아했던 풍경이 삽시간에 아련해진다. 복잡했던 머릿속까지 새하얗게 만드는 깨끗한 풍경이다. 게다가 걸음마다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는 귀마저 청량하게 만든다.
눈을 옮겨 길게 뻗은 슬로프를 바라보면 또 다른 세상이다. 색색의 의상을 갖춘 스키어들이 질주하는 모습이 시원스럽다. 온몸으로 겨울 눈송이와 칼바람을 즐기는 스키어들의 모습은 바라보기만 해도 짜릿하다. '순백의 계절'을 맛보러 겨울 덕유산으로 떠나보자.
◆눈이 온 후에 너무나 아름다운 상고대
덕유산은 워낙 '눈'으로 유명하다. 남쪽에 위치해 있지만, 지리적 영향으로 겨울이면 많은 눈이 쏟아진다. 겨울이면 서해의 습한 대기가 큰 봉우리를 넘다 머무르며 차가운 공기와 만나 눈을 뿌려대기 때문이다.
좀처럼 눈 구경하기 어려운 대구. 눈이 내린다고 해봤자 새벽녘 1~2㎝ 얇게 흩뿌렸다 해와 함께 사라지는 게 고작이다. 그래서 하얀 눈 세상을 만나기 위해 2시간 남짓 거리인 무주로 향했다. 곤돌라를 타고 상고대로 유명한 덕유산의 겨울 절경을 눈에 담아보고 싶었다.
덕유산 상고대는 택일을 잘해야 그 아름다움을 100% 만끽할 수 있다. 습도가 부족한 날이면 고작 메마른 나뭇가지만을 바라보거나, 응달에 올망졸망 자리 잡은 몇몇 상고대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영하의 기온에서 주변의 습기가 나뭇가지에 엉겨 붙어 피어난 나무서리를 일컫는다. 나뭇가지에 꽃이 핀 것처럼 얹혀 있는 눈꽃과는 달리 마치 바람결을 따라 얼어붙은 상고대는 마치 바다 밑 산호초나 사슴의 뿔을 연상케 한다. 특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 있는 하얀 상고대가 색채의 대비로 인해 더욱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에 눈이 한껏 내린 뒤 맑은 날을 택하는 것이 최상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상고대를 만나기 위해 일주일 전부터 기상을 체크하며 날짜를 조절했지만 결국 하늘은 내 편이 아니었다. 적당한 습도를 바랐지만, 결과는 대설주의보! 뉴스 속에서나, 혹은 소설을 통해서나 접하던 단어가 내 현실이 된 것이다.
출발 당일 아침부터 대구에서부터 눈이 뿌려대기 시작했다. '곧 그치겠지' 생각했던 눈발은 대구를 벗어나고 고속도로를 들어서고, 서쪽으로 향할수록 점점 더 강해졌다. 점점이 흩뿌리던 눈발은 전라도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굵직한 눈송이로 변했고, 하얀 솜털들이 정신 차릴 틈 없이 차량 유리로 돌진해 왔다. 이미 풍경은 하얀 눈 세상으로 변했다. 오전 이른 시간인데다 계속해서 눈이 펑펑 쏟아지다 보니 일부 간선도로를 제외하고는 제설이 이뤄지지 않아 차량에서는 수시로 'ABS' 사인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두려움이 엄습해오며서 잠시 갓길에 차를 세웠지만, 돌아갈 수도 없는 길. 눈길에 익숙한 듯 거침없이 오가는 차량들을 보며 용기를 얻어 거북이걸음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덕유산 리조트.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식이 전해졌다. 폭설과 강풍으로 덕유산 설천봉까지 운행하는 관광 곤돌라가 '운행정지'라는 방송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어머니의 산, 그리고 구천동 계곡
덕유산이 눈꽃 산행지로 손꼽히는 이유는 산세가 아름답고 적설량이 많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곤돌라가 있기 때문. 산행을 즐기지 않는 이들도 곤돌라를 타고 해발 1,520m 설천봉까지 오를 수 있어 누구나 설산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해발 1,614m 향적봉 정상까지는 고작 20여 분 남짓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가파르지 않은 트레킹 코스다. 더구나 설천봉에는 따뜻한 음료와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휴게소, 기념품점이 있어 설산 감상과 함께 따스한 차 한잔의 여유도 즐겨볼 수 있다. 하지만 가벼운 트레킹이라고 해서 준비를 소홀히 해서는 곤란하다. 덕유산의 강추위에 대비하기 위해 따뜻한 복장과 함께 핫팩을 든든히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눈과 결빙에 대비해 아이젠은 필수다.
한파를 견디기 위해 정말 단단히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섰지만 눈 덮인 덕유산리조트는 정말 차가운 냉기로 가득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로 냉기가 파고들었고, 머리는 쨍하니 둔기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펑펑 쏟아지는 폭설에 갓 내린 뽀드득거리는 눈을 마음껏 밟아볼 수 있는 것은 마냥 기분 좋은 일이다.
곤돌라 운행정지라는 황망한 소식에 잠시 정신이 멍했다. 겨울 스키철 인파로 붐빌 것만 신경 썼을 뿐, 폭설로 운행이 멈출 수 있다는 것은 생각지 못한 이변이었다. 사진 장비나 등산가방을 멘 수많은 인파가 곤돌라 매표소 앞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날씨 정보를 확인하니 오후에는 눈이 그치고 반짝 빛이 난다는 한줄기 희망 같은 예보였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기상 상황이 바뀌면 운행이 재개될 수도 있다"고 했다. 워낙 힘든 눈길을 운전해 온 터이기에 발길을 돌리기 못내 아쉬웠다. 결국 하루를 꼬박 눈 내리는 덕유산 풍경을 바라보며 기다렸지만 하늘은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만약 덕유산 눈 구경을 하고 싶다면 기상예보 확인은 필수, 그리고 2월까지는 주말과 공휴일에 곤돌라를 타기 위해서는 홈페이지(www.mdysresort.com)에서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찬바람 맞으며 몇 시간을 줄 서서 기다리는 낭패를 경험할 수 있다. 동계 시즌 곤돌라 상행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며, 하행은 오후 4시 30분까지다.
멀리 덕유산을 찾아 무주 땅까지 갔다면 무주구천동 계곡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구천동 33경을 찾아보는 쏠쏠한 묘미가 있다. 옛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다는 '나제통문'을 시작으로 국립공원관리사무소가 가운데 위치해 있고, 반대편 백련사에 이르기까지 약 28㎞에 달하는 계곡에 기암절벽과 폭포 등이 굽이친다. 이 중 최근에는 구천동 33경 중 제16경인 인월담부터 제25경인 안심대의 비경을 따라 구천동어사길 코스가 조성돼 있다. 소설 '박문수전'에서 어사 박문수가 구천동을 찾아 어려운 민심을 헤아렸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길로 덕유마을이 형성되기 전 지역 주민들이 지나다녔던 길이기도 하다. 추위에 조금 적응이 됐다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봄철이면 계곡 따라 피는 철쭉꽃을 떠올려봐도 좋을 일이다.
고즈넉한 백련사를 걸으며 겨울 산사의 참맛을 느껴볼 수도 있다. 백련사는 구천동 계곡에 있던 14개 사찰 중 유일하게 남은 절로, 신라 흥덕왕 5년(830년) 무염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보다는 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가 구천동에 은거했는데 그가 머무른 자리에 하얀 연꽃이 피어나 지은 절이라는 설화도 있다.
'어머니의 산'이라고도 불리며 넉넉하게 품어주는 겨울 덕유산에서 아직 좀 더 이어질 강추위를 이겨낼 힘을 얻어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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