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무를 가져다주었다. 텃밭 한쪽에 심은 무인데 몇 해째 지은 농사 중에 가장 잘 되었다며 흐뭇한 표정이다. 지난 저녁에 무전을 부쳤더니 맛이 그만이라고 한다.
나도 불현듯 무전을 부치고 싶었다. 옛날이 그리워졌는지도 모르겠다. 유년의 고향, 정지에서 전 부치던 엄니와 그 옆에서 전을 잡수시던 아버지 모습이 유독 눈에 밟힌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한 겨우살이 준비를 하셨다. 삽짝 앞 텃밭에 움을 파서 바닥과 가장자리에 짚을 두툼하게 깔고 둘렀다. 가을에 농사지은 조선무 중에서도 참하게 생긴 것만 골라 움에 저장했다. 통나무를 잘라 속을 파내어 사용했던 벌통을 움의 숨구멍으로 남기고, 나뭇가지와 짚으로 움을 정리한 후 흙을 덮었다. 무를 꺼낼 때는 단단하고 매끈한 막대기에 뾰족한 침을 박아 움의 숨구멍에 힘 있게 내리찍으면 무가 딸려 나왔다.
엄니는 전철(煎鐵)대용으로 무쇠 솥뚜껑을 뒤집어놓고 전(煎)을 부쳤다. 무를 갸름하게 잘라 손잡이 모양까지 만들었다. 그 단면에 기름을 듬뿍 발라 지짐판을 휘휘 두르며 기름칠을 했다. 먼저 밀떡을 부쳐 지짐판을 길들인 후 본격적인 지짐질을 했다.
지짐판 아래에는 숯불이 벌겋게 불기운을 올렸다. 불기운이 세면 숯불을 밖으로 끄집어내고, 불기운을 돋울 때는 부채질을 했다.
엄니는 통무를 세로로 길게 썰었다. 그리고는 채반에 무를 안쳐 가마솥에서 한 김 올린 후에 식혀서 '무' 전을 부쳤다. 아버지는 무전을 맛있게 드셨다. 막걸리 한 잔 쭉 들이키고선 간장에 찍어 드시거나, 명절 때 고기 찬이 있으면 무전에 말아서 드시곤 했다. 빤히 바라보는 내게 먹어보라고 건네주었지만 어른들이 '맛있다'고 하는 그 맛을 왜, 내 입은 느끼지 못했을까.
고구마 전처럼 달큰하지도 않고 생선전처럼 쫄깃하지도 않은, 그냥 아무 맛도 모를 '무' 맛.
무를 손질하여 밀가루 반죽을 얇게 묻혀 전을 부쳤다. 어릴 때 한 입 베어 물었다가 엄니 눈치 보느라 뱉지도 못하고 우물거리다 꿀꺽 삼켜버렸던, 서걱거리면서도 무슨 맛인지 모를, 그 무전을 구워서 조심스레 한 입 베어 물었다.
-아, 이 맛이었구나.
기름에 지진 밀가루 반죽의 쫄깃함 사이로 달짝지근한 무, 씹을수록 입안에 물기가 가득하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그 맛있다던 '무' 맛, 무 본래의 맛을 느꼈다.
그동안 외면했던 게 후회될 정도로 입맛을 당긴다. 잠재된 기억 한편에 그 '무 맛'이 있었나 보다. 유년의 고향은 늘 나의 발치에서 머물고 겨우살이 씨앗처럼 입맛을 묻어두고 있었나 보다.
Tip:가을무는 인삼보다 낫다고 할 정도로 영양적 효능이 뛰어나다. 겨울철 비타민 공급과 특히 소화 촉진에 도움을 준다. '전'과 '적'의 구분은 이러하다. 반죽을 묻혀 지진 것(지짐)은 '전', 꼬챙이에 꿰어서 지진 것을 '적'이라고 보면 된다.
무의 서걱거리는 맛이 싫으면 살짝 쪄서 사용한다. 반죽을 잘 입히려면 먼저 무에 밀가루를 묻혀서 털어내고 옷을 입힌다. 고기쌈으로 먹을 경우에는 무를 최대한 얇게 썰어서 부쳐야 한다. 무 본래의 맛을 느끼려면 순수 밀가루 반죽에 소금 간을 약하게 하여 부친다. 싱거우면 양념장을 찍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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