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주의 味路 속으로…『신라왕이 몰래 간 맛집』

고집스레 고향 냄새를 지켜온 식당, 동해 식재료를 정직하게 버무린 곳 등

문화유적을 둘러보고 출출한 배를 채우기에 안성맞춤인 쌈밥. 휴먼앤북스 제공
문화유적을 둘러보고 출출한 배를 채우기에 안성맞춤인 쌈밥. 휴먼앤북스 제공

신라왕이 몰래 간 맛집/ 김남일 기획/ 이명아 지음/ 이동춘 사진/ 휴먼 앤 북스 펴냄

경주는 흥미롭다. 사찰과 왕릉, 절터와 불탑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장소이자 산과 들, 강과 바다로부터 모여든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음식은 남도가 제일이라 했다. 하지만, 천년고도의 비밀이 달리 있으랴. 경주에는 드러내지 않아 몰랐던 맛집이 골목골목 자리 잡고 있다. 젊은 층의 활기마저 쉬어가는 황리단길, 해녀의 바다냄새를 머금은 감포 등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곳이 경주다. 행차하던 신라 왕도 멈추게 하지 않았을까.

◆쳔년의 왕도(王都), 맛을 품다

경주는 억울하다. 볼거리에 밀려 먹을거리는 빛을 보지 못했다. 불국사와 석굴암, 동궁과 월지, 대릉원 등은 경주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하루 이틀 머물렀다 가는 관광객이라면 문화유적을 둘러보고 쌈밥으로 출출한 배를 채운 뒤 황남빵을 사들고 가는 게 경주 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관광객이 몰랐던, 진짜 경주의 맛은 따로 있다. 책 '신라왕이 몰래 간 맛집'은 아는 사람만 아는 진짜 맛집을 소개한다. 김남일 전 경주부시장이 기획하고 잡지사 음식 평론가이자 요리연구가인 이명아 숙명여대 객원교수가 썼다. 경북지역 종가의 의례, 한옥, 음식문화를 담아내 온 사진작가 이동춘의 사진은 음식과 재료를 더 맛깔 나고 정갈하게 보여준다.

언론 잡지에 소개됐거나 모범음식점 인증을 받은 곳은 될 수 있으면 배제했다. 가족 단위 관광객이 찾을 수 있는 곳을 발로 뛰어 찾아냈다. 경주를 떠올리게 하는 56곳의 맛집은 이렇게 선별됐다. 왜 하필 56곳일까? 궁중음식에 질린 왕이 잠행한다면 찾아갔을 법한 식당을 상상하는 데서 만든 제목에 힌트가 있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 신라를 다스린 왕의 수다.

고집스레 고향을 지켜온 냄새가 나는 식당, 남산과 단석산, 형산강과 지천, 동해에서 나는 소박한 식재료를 정직하게 버무려 낸 곳은 생각보다 많았다. 저자는 1년간 경주 구석구석을 누비며 먹을거리를 찾았다. 색다른 음식이나 재료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주인에게 물어 재료 파는 곳을 찾았다.

◆힐링여행 가이드

책은 맛지도를 그리기에 앞서 식재료가 나오는 환경에 주목한다. 첫째는 바다다. 양남 주상절리와 문무대왕 수중릉도 좋지만, 감포를 추천한다. 번잡하지 않은 해변에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감포항이 일제에 문을 연 건 1920년이었다. 일본인의 살림집, 점포로 쓰인 적산가옥은 민족의 아픈 역사를 증언한다. 퇴락한 역사거리와 송대말 등대, 주상절리를 봤다면 다음은 어판장이다. 동해안 등줄기에서 유독 많이 잡히는 가자미를 이용한 구이, 뼈 육수, 무침회, 미주구리회와 조림, 거기에 가자미식해까지. 책은 경주에서 먹어야 제대로 입에 감기는 밥상을 차례로 차려내며 식도락여행의 재미를 선사한다.

이름난 사찰이 아니라도 잘만 찾으면 정신이 맑아지는 사찰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운 좋으면 한국에서 차(茶) 문화가 최초로 시작됐다고 알려진 기림사에서 오종약수차를 한 사발 얻어 마실 수도 있다.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커피전문점에 지친 힐링여행에는 제격이다.

'뭐 볼 게 있겠나' 하는 생각으로 황리단길을 걷다 보면 완성되지 않은 경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과 경주 황남동의 '황'을 불여 만든 이름인데 TV에 여러 차례 소개되며 '핫 플레이스'로 등극했다. 천년 유적이 주는 무게를 잠시 떨치고 싶다면 젊음과 자유의 거리를 누비라고 추천한다.

토박이처럼 놀고 먹고 싶다면 5일장으로 가면 된다. 경주에는 공설(11개)과 사설(9개)을 합쳐 20개의 전통시장이 있다. 감포시장'성동시장'중앙시장 등 경주를 대표하는 시장은 상설장과 5일장을 겸한다. 건천읍장이라 불리는 건천장은 같은 자리에서 100년을 넘게 섰다. 알 굵은 마늘, 벌건 쇠를 일일이 손으로 두들겨 수작업하는 대장간은 건천장이 내놓는 작품이다. 엄마를 따라가서 떡볶이와 순대 한 줄을 먹고 왔던 시장은 변신, 진화하고 있다. 20가지가 넘는 반찬을 정성 들여 차려낸 좌판이 10개쯤 모여 '한식뷔페' 거리를 만들었다. 어느 때든 성동시장에 가면 푸짐한 한 상이 기다리고 있다.

◆경주, 이 맛에 간다

미식 여행의 트렌드를 따라 경주를 여행하면 남도음식과 전혀 다른 향토음식의 참맛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읍성 안에 있던 토속 밥집과 선술집은 프랜차이즈 레스토랑과 커피집에 자리를 내줬다. 골목 안으로 숨어든 집은 경주 사람이라야 찾아갈 수 있으니 경주를 찾는 이들에게 이 책은 필독서다.

가족과 짧은 휴가여행, 출장이나 나홀로 여행을 하게 된 사람들이 믿고 찾을 수 있는 식당을 정리했다. 신선한 식재료를 사용하거나 기본적인 장이나 김치를 직접 담그는 집을 위주로 선별했다. 한 식당은 친환경 농법으로 직접 농사를 지어 웬만한 재료를 충당했는데 출근 전 직원이 밭에 나가 합심해서 벌레를 잡는다고 했다. 새벽에 직접 배를 타고 바다에서 조업하거나, 동네 해녀 할머니들이 잡아오는 성게를 제철에 구입해 1년 사용분을 확보하는 횟집들은 기본 상차림에 내는 미역국조차 직접 채취한 재료를 사용하곤 했다.

경주 사람들은 식초를 직접 만들어 국수를 비벼주는 집이 있고, 열 가지도 넘는 장아찌를 아침마다 조금씩 꺼내 새로 양념한 밑반찬을 내는 곳이 한정식집이 아니라 민물매운탕집이라는 반전에 놀라지도 않는다. 그들에겐 그저 단골집일 뿐인데. 맛집을 찾겠다고 TV 프로그램이나 SNS를 뒤져서는 절반도 못 가보고 돌아서야 했을 곳이다.

경주에 대한 추억은 제각각이다. 학창시절 수학여행으로, 아련한 첫사랑의 데이트코스로, 역사기행으로, 가족여행으로. 대구경북 사람치고 경주를 안 가본 이도 드물다. 볼거리 많고 즐길거리 많은 이곳을 음식으로 재발견하는 것은 어떨까.

▷기획한 김남일은…

고려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경북대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재학 중 행정고시에 합격해 국정홍보처, 국무총리실을 거쳐 경북도청 문화관광체육국장과 경주부시장을 지냈다. 행정도 예술이라는 신념으로 지속 가능한 삼촌(산촌'강촌'어촌) 만들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 '독도, 대양을 꿈꾸다' '마을 예술을 이야기하다'가 있다. 311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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