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에 담긴 사연 곽휘원의 아내
벽사창에 기대서서 봉투를 뜯어보니 碧紗窓下啓緘封(벽사창하계함봉)
조그만 종이 한 장 텅텅 비어 있습디다 尺紙終頭徹尾空(척지종두철미공)
옳거니, 낭군님이 이별 한을 품으시고 應是仙郞懷別恨(응시선랑회별한)
날 그리는 온갖 사연 침묵 속에 담았네요 憶人全在不言中(억인전재불언중)
사오 년 전이다. 참 어여쁜 여학생 하나가 겨울 방학 때 제법 두툼한 편지를 보내왔다. 화들짝 뜯어보다가, 그만 어안이 벙벙해서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기나긴 편지에 뜨겁고도 진진한 사랑이 구석구석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연인에게 보낸 편지였다. 아마 그녀의 연인도 그날쯤 난데없는 편지를 받고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자기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 연인의 선생에게 보낸 편지였을 테니까. 얼마 후에 그 여학생이 연구실로 나를 찾아왔다. 연인으로부터 돌려받은 편지를 꺼내면서 가만히 얼굴을 붉혔다. 나도 잘못 받은 편지를 돌려주며, 그냥 슬며시 웃어주었다. 서로 말없이 마주 앉아서 아주 오래도록 차를 마시다가 헤어졌다.
이 일화가 생각날 때마다 청(淸)나라의 시인 원매(袁枚)의 '수원시화'(隨園詩話)에 수록된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오른다. 곽휘원(郭暉遠)이라는 사람이 고향을 떠나서 벼슬살이하다가 그리운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다 써서 봉투에 넣을 때, 실수로 그만 사연 많은 편지 대신에 백지를 넣어 보내고 말았다. 아내가 남편의 편지를 받고 반가운 마음에 화들짝 뜯어보니, 어이없게도 백지 한 장이 전부였다. 이에 아내는 답장 대신에 위의 시를 써서 남편에게 보냈다. 눈 내린 들판같이 하얀 편지, 바로 그 순도 100%의 무언(無言) 가운데 오롯이 담겨 있는 온갖 사연들을 잘 읽었다는 뜻이 되겠다. 재치가 넘치는 시이기도 하나, 꿈보다 해몽이 더 기가 막히는 견강부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심전심의 교감이 오고 가는 부부 사이에, 말이 없다 해서 모를 게 도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사오 년 전 학기말 시험 때다. 시험지를 나눠주자마자 조용하던 교실에 한동안 다각다각 말 달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하지만, 불과 얼마 후에 여기저기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우르르 답안지를 내고 나간다. 죄다 나갔는데, 텅 빈 교실에서 최후의 일각까지 몸부림을 치며 사투를 벌이는 여학생이 있다. 무슨 경천동지할 답안지를 작성하고 있나 보다 했는데, 정말 놀랍게도 완전 백지를 내고 나간다. 나는 이 눈 내린 들판같이 하얀 종이를 눈에 안 보이는 글씨로 충만한 엄청나게 사연 많은 백비(白碑'글씨를 새기지 않은 비석)로 읽는다. 그러나 사연이 아무리 많아도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므로 어쩔 수 없이 에프를 주노니, 용서하시라 백비를 쓴 이여! 네 마음 내가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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