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언론의 자제?

만주사변(1931)은 일본이 중국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일본 관동군이 벌인 자작극이었다. 당시 관동군은 러일전쟁 전리품인 남만주철도를 경비한다는 명분으로 만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관동군 참모였던 이시와라 간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이 주도해 남만주철도의 일부 구간을 일부러 폭파하고 중국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런 관동군의 행위는 확전 금지라는 내각의 지침을 어긴 독단전행(獨斷專行)으로, 군법상 사형감이었다.

하지만 일본 언론은 오히려 이를 격찬하고 나섰다. 일본 최대 부수의 아사히신문은 1931년 10월부터 6개월간 호외(號外)를 131회나 발행하고, 만주사변 관련 영화를 자체 제작해 1천만 명을 대상으로 4천24회나 상영하는 등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에 들어간 경비는 무려 100만엔으로, 당시 총리 월급(800엔)의 1천 배가 넘는 거금이었다. 아사히의 경쟁자였던 마이니치신문도 아사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당시 마이니치신문 내에서 "만주사변은 마이니치가 후원하고 관동군이 주최한 전쟁"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 그 규모와 열기를 알 만하다.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 때는 더했다. 보도와 논평이란 본업(本業)을 넘어 중국을 지원한다며 영국을 비난하는 공동 성명까지 냈다. "영국은 지나사변(支那事變'일본은 중일전쟁을 이렇게 불렀다) 발발 이래 제국의 공정한 의도를 곡해해서 원장(援蔣'장개석 지원) 책동을 부렸다… 우리는 성전을 완수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일체의 방해에 대해서는 단연히 배격하리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1939년 7월 15일 발표된 이 공동 선언에는 일본 내 거의 모든 신문과 도메이통신까지 참여했다.

태평양전쟁과 패전 때까지도 일본 언론의 행태는 그대로였다. 자존자위(自存自衛)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제국주의적 확장이 필요하다는 군부의 논리를 충실히 뒷받침했다. 그런 점에서 1945년 이전의 일본 신문은 언론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이다.

북한 예술단 사전 점검단의 방남을 전후해 정부가 우리 언론에 대해 "비협조적인 보도가 많으니 자제해 달라"고 해 빈축을 사고 있다.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는 소리다. 언론은 '감시견'(watching dog)이다. 상대가 누구건 잘못하면 짖고 물어뜯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론이 아니다. 정부가 잘하면 언론에 협조를 요청할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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