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존중하고 정의를 충족시키는 것이 파리평화회의의 임무였다. 그러나 삶을 재구축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임무는 승자의 아량이라는 원칙에 따라서도 필요했지만, 유럽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긴 '평화의 경제적 결과'(1919)의 한 대목이다.
케인스는 1차 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평화회의에 영국 대표단의 재무부 수석대표로 참석했다가 영국을 포함한 연합국 모두가 독일에 가혹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 수석대표직에서 사퇴한 뒤 귀국해 이 책을 썼다. 당시 케인스는 독일 경제가 망가지면 유럽 경제 전체도 망가진다며 독일의 배상금은 독일이 감당할 수 있는 100억달러를 넘지 말아야 하며, 연합국이 전쟁 동안 서로에게 진 빚도 탕감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연합국들은 독일의 배상금을 무려 330억달러로 결정했다. 독일의 상환 능력은 안중에도 없었다. 연합국 간 상호 채무의 탕감도 없었다. 케인스는 이런 내용의 조약안을 보고 "정당하고 영속적인 전쟁의 토대일 뿐"이라며 "빌어먹을" 조약이라고 했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미국의 책임도 매우 크다. 당시 영국 42억달러, 프랑스 68억달러, 이탈리아 29억달러 등 연합국은 미국에 엄청난 전시 채무를 지고 있었다. 연합국들은 독일에 뜯어내는 배상금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결국 미국이 채무의 상환 조건을 완화하는 것이 독일을 죽이지 않고 독일에서 배상금을 받아내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케인스는 이를 미국에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이에 케인스는 "당신들 미국인은 부러진 갈대입니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귀국해버렸다. '부러진 갈대'는 구약성경 이사야 36장 6절 "너는 저 부러진 갈대 지팡이에 지나지 않는 이집트를 믿는다마는, 그것에 몸을 기대는 사람마다 손바닥만 찔리게 된다. 이집트 임금 파라오는 자기를 믿는 모든 자에게 그러하다"에서 인용한 것으로, '쓸모없다'는 의미이다.
23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막된 세계경제포럼(일명 다보스포럼)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성토장이 되고 있다. 22일 발동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겨냥해 각국 정상들이 한목소리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비판했다. 케인스가 살아서 이번 포럼에 참가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파리평화회의 때와 똑같이 '부러진 갈대'라고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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