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학부모 교육, 부모됨의 길을 묻다] 아이를 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어머니는 아들 포레스트를 스쿨버스에 태운다. 아들은 제대로 걷지를 못해 다리에 교정기를 채웠고 지능도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떨어진다. 이윽고 스쿨버스 앞문이 열린다.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운전사와 함께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아이들이 가득한 스쿨버스를 타고 포레스트는 학교로 간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 앞부분의 한 장면이다.

새 학년도에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부모의 마음에는 포레스트의 어머니와 같은 걱정이 있다. 자녀에게 포레스트와 같은 장애가 없다 할지라도 그렇다. 아이가 학교라는 낯선 조직 속에서 견디고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눈에는 아이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약한 존재로 여겨지는데 영화는 이것을 장애가 있는 포레스트로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학교에 와서 대부분 잘 적응한다. 특히 요즘 학교는 학생 수가 급감하여 신입생을 귀빈 대접하듯이 맞이하고 교육과정도 학생 개별 요구에 맞추어 주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때 부모에게는 숨어 있던 걱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내 아이가 학교에서부터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가 끝도 없는 경쟁을 통해 선택된 사람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잘살게 된 것을 온몸으로 지켜보며 살아온 부모들로서는 당연히 갖게 되는 걱정이라 할 수 있다. 학교에서 뒤처져도 사회에서 성공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았지만, 학교에서 먼저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모든 성공의 첫 단추가 된 경우를 훨씬 더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학교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경쟁의 조건을 만들고 그 조건에 맞추어 아이를 배열하는 일을 하면서 부모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해 온 면이 있다. 온갖 교육의 가치를 경쟁이 가능한 객관적 지표로 만들고 수치로 차별화할 때에만 교육의 성과를 인정하는 분위기까지 나타났다. 학교는 배워야 할 것을 가르치기보다 평가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데 주력해 왔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애써 수치화, 계량화한 가치일수록 앞으로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일수록 인공지능 작동의 기본원리인 빅데이터 기반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대체하기가 쉬워서 이런 것에 굳이 사람이 몰두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욱 알고리즘으로 재구성하기 어려운 지점에서부터 인간의 능력과 존재 이유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는 매일 고민하고 있다. 수치화된 경쟁 구도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학생을 기를 것인가,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한 유능한 학생을 기를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경쟁에서의 우위로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선명한 목표와 방법이 확보되지 않아서 학부모도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합의된 목표와 일사불란한 방법은 예전처럼 표준화된 인간형을 키우는 데 필요한 것이다. 이제는 사회의 합의된 표준대로 작동하는 학교에서 부모의 공통된 바람대로 성장하는 학생은 없다. 있다 할지라도 그런 학생이 독자적인 유능한 존재로 살아갈 수 없는 복잡한 시대가 우리 앞에 와 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아이에게 꿈과 희망만 먹이려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예측이 불가능한 맥락 속에서 성취와 좌절, 기쁨과 아픔을 경험하면서 끊임없는 성찰과 창조로 알고리즘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독자적인 존재로 아이가 완성되어 가도록 돕는 것이 교육이다. 사람을 키우는 학교는 그러한 체험의 장이 되어야 하고 학부모는 그 체험의 의미를 깊게 해주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된 포레스트도 걱정하면서 아들을 스쿨버스에 태운다. 껌을 쩍쩍 씹어대는 운전사와 온갖 악동들이 가득한 스쿨버스를 타고 포레스트의 아들도 학교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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