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만 명 가운데 250여만 명, 16만8천330점 중 9천970점.'
앞은 일제강점 암흑기 시절 해외를 떠돌다 1945년 되찾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해 불귀(不歸)의 삶을 살던 동포의 추정치, 뒤는 긴 세월 나라 밖에 묶인 우리 문화재와 지금까지 환수된 숫자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1천 번 가까운 외침에 시달렸다. 물론 대륙 진출도 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전성기 시절엔 중국 대륙은 마당이었다. 중국 사서(구당서)가 기록할 만큼 넓고 드셌다. '동서 2천100리, 남북 2천 리'. 남북 강산의 8배 넘는 181만㎢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의 이민족 강자 북위(北魏)가 고구려에 국혼(國婚)을 요청할 정도였다.
청구(靑丘)의 우리 강산은 하지만 힘든 시절이 더 많았다. 그런 탓에 온갖 피해는 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힘없는 백성이다. 나라 패망으로 백성은 노예로 팔려 갔거나 머슴으로 삶을 마쳐야만 했다. 사람이 강제로 끌려간 피해는 백제'고구려 망국,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때까지 되풀이됐다. 그 숫자 또한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이다.
사람조차 이러니 물건은 더했다. 불타고 빼앗기기 일쑤였다. 기록의 멸실은 어쩔 수 없다. 조선 실학자 이규경이 할아버지 이덕무의 글을 인용해 밝힌, 당나라의 우리 서적 소각, 임진왜란 방화, 청나라의 호란 약탈 등 10가지 항목은 그럴 만한 분석이다. 일제강점 수탈까지 더하면 오늘날 남은 기록물은 기적과도 같다.
문화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라가 겨우 힘을 기르고 정신을 차려 2011년 문화재보호법을 고쳐 국외 소재 문화재 보호 조치에 나섰고 이듬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세워 나라 밖 문화재를 살폈다. 지난해 4월 현재 16만8천330점으로 파악됐고, 지금까지 9천970점만이 돌아왔다. 이런 아픈 사연의 문화재와 다른 갈래이지만 최근 반가운 문화재 귀환 소식이 경북 칠곡에서 있었다.
독일인 신부 카니시오 퀴겔겐(한국명 구걸근)이 1918년 우리 글로 펴낸 최초 양봉 교재인 '양봉요지' (養蜂要誌)가 보관처인 독일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을 떠나 지난달 왜관수도원에 영구 대여 형식으로 돌아와 문화재청에 정식 등록됐다. 100년 만에 다시 태어난 곳을 찾아온 셈이다. 이참에 일본의 한 시설에 보관 중인 것으로 발표된 용(龍)이 새겨진 조선왕실양봉장의 벌통도 되찾으면 어떨까 싶다. 그 벌통의 지금 있는 자리 역시 마땅하지 않아서다. 뜻있는 사람들의 활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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