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하빈의 시와 함께] 상인일기

# 상인일기

김연대(1941~ )

하늘에 해가 없는 날이라 해도

나의 점포는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하늘에 별이 없는 날이라 해도 나의 장부엔 매상이 있어야 한다 메뚜기 이마에 앉아서라도 전은 펴야 한다 강물이라도 잡히고 달빛이라도 베어 팔아야 한다 일이 없으면 별이라도 세고 구구단이라도 외워야 한다 손톱 끝에 자라나는 황금의 톱날을 무료히 썰어내고 앉았다면

옷을 벗어야 한다 옷을 벗고 힘이라도 팔아야 한다 힘을 팔지 못하면 혼이라도 팔아야 한다 상인은 오직 팔아야만 하는 사람 팔아서 세상을 유익하게 해야 하는 사람 그러지 못하면 가게문에다 묘지라고 써 붙여야 한다.

―시집 『꿈의 가출』(혜화당,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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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팔공산 자락 몇몇 식당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공교롭게도 모두, 작자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구전 시가도 아닌데, 무명씨나 작자 미상의 시로 떠돌고 있어 안타까웠다. 이 시의 작자는 젊은 시절 도시에서 장사를 하다가 귀촌하여 그의 고향 안동 길안에 버젓이 살고 있는 김연대 시인이다.

메뚜기 이마에 앉아서라도 전은 펴야 한다거나, 강물이라도 잡히고 달빛이라도 베어 팔아야 한다는 것은 상인뿐만 아니라 시인도 그러하다. 전(廛) 대신에 상(想)을 펴야 한다는 것의 차이만 있을 뿐, 혼(魂)을 팔아서 업(業)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은 둘 다 매한가지! 따라서 상혼(商魂)을 시혼(詩魂)으로 바꿔 놓으면 상인일기는 다름 아닌 시인일기다. 그렇다면, 시인은 오직 써야만 하는 사람, 써서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지 못하면 우리 시인도 자신의 서재에다 '묘지'라고 써 붙여야 한다. 하다못해 어느 시인의 우스갯말처럼 '전직 시인의 방'이라도 써 붙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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