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잇따른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던 한반도 정세에 중대 변화 가능성이 감지되고 있다. 강공 일변도의 도발을 지속하던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태도 변화를 보여주는가 싶더니 이달 평창동계올림픽을 맞아 자신의 여동생인 이른바 '백두혈통'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을 전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보내 친서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을 방북하도록 초청한 것이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압박과 제재에 북한이 마침내 굴복해 평화의 길로 나온 것인지, 위장 평화 공세를 통해 제재와 압박 국면을 탈피하려는 것인지, 여러 분석이 엇갈리는 가운데 향후 남북 정상회담의 실현에는 미국의 입장이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략적 인내에 의존했던 과거 미국의 대북 유화 정책이 결국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이어진 만큼, 이번에도 북한의 '전술'에 말려들 수 있다는 미국 내 강경파의 목소리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평창올림픽 개막식 행사 참석차 우리나라를 찾았던 미국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내놨던 대북 강경 발언은 현재 미국의 '목소리'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정은 친서 내용은 과연 무엇?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10일 오전 청와대를 찾은 김 제1부부장은 파란색 파일 안에 든 김 위원장의 친서를 조심스럽게 들고 접견장에 들어섰고, 문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다.
파일에는 김 위원장이 외교 활동에 사용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직함과 국장(國章)이 새겨져 있었다. 문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파일을 열어 친서의 내용을 확인한 후 그대로 다시 덮은 뒤 임종석 비서실장을 통해 송인배 제1부속실장에게 건넸다. 문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친서의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친서를 읽는 동안 문 대통령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고, 어떤 언급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외국 정상이 보낸 친서는 우리 정상만 확인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김 위원장이 보낸 친서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친서의 분량은 그리 길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보통 크기의 활자를 기준으로 A4 용지 3분의 2 정도 분량으로, 하단에는 김 위원장의 친필 서명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2014년 12월 김정은 당시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게 보낸 친서보다도 분량이 적은 것이다. 당시 현 회장이 받은 친서는 A4용지 1쪽 반 분량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으로 미뤄볼 때 김 위원장의 친서에는 구체적인 남북 현안에 대한 의견 제시나 획기적인 제안보다는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는 내용과 함께 남북관계 개선에 관한 원론적인 입장 표명이 담겼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김여정 특사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담은 친서를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김 특사가 문 대통령에게 구두로 전한 "문재인 대통령을 이른 시일 안에 만날 용의가 있다. 편하신 시간에 북을 방문해 주실 것을 요청한다"는 메시지의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을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의 조부인 김일성 주석이 1985년 9월 5일 허담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를 통해 비밀리에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각하와의 평양 상봉이 이뤄질 것을 기대한다"는 친서를 전한 사실이 뒤늦게 공개되기도 했다.
◆남북 정상회담 성사는 미국 입장에 달려
남북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서는 한미 간 조율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핵무기와 ICBM이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분명히 작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핵화가 전제되지 않는 남북 정상의 만남을 미국이 용인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에 앞서 이뤄진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도 한미 간 대북 정책 조율하에 이뤄졌다.
2000년 제1차 회담은 '페리 프로세스'로 대표되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관여(engagement) 기조가 김대중 정부의 화해'협력 정책과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또 2007년 제2차 회담은 북한에 강경했던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적극 나서는 결단을 했고 이를 통해 2007년 2월 북한 비핵화 초기 단계 조치를 담은 6자회담 2'13 합의가 나왔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국제정치 전문가들의 일관된 분석이다.
이와 관련, 우리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의 북한 고위급대표단 접견 내용을 미국 측과 상세히 공유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한국 측과 긴밀히 연락하고 있다"는 원론적 수준의 반응만 내놓고 있지만 북한에 대해 유화정책으로 돌아서는 '급변침'을 미국이 할 것이란 시각은 현재로서는 적다.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이 이번 방한 기간 북측 대표단과의 접촉을 사실상 피한 정황에다 쏟아낸 발언의 수위를 볼 때 미국의 입장이 쉽게 변할 가능성이 작다는 것이 국제정치 전문가들의 한목소리다.
펜스 부통령은 방한 전인 지난 7일 일본 방문 때 "전례 없이 강력한 대북 경제 제재를 곧 발표할 것"이라고 밝힌 것을 시작으로 10일 우리나라를 떠날 때까지 대북 압박을 누차 강조했다. 대화 의향은 있으나 군사 옵션 카드까지 배제하지 않은 채 북을 몰아세워 그들이 거부해온 비핵화 협상을 하겠다는 게 미국의 기조인 것으로 보였다.
이 같은 미국의 속내를 감안할 때 미'일과의 공조를 통한 제재 강화 드라이브와 북한의 남북관계 개선 요구 사이에서 문재인 정부는 향후 어려운 줄타기를 해야 할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당장 평창올림픽'패럴림픽 종료 후 한미 연합군사훈련 재개 시기와 규모 등을 둘러싼 한미 간 조율은 첫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남북 정상회담 실현된다면 언제쯤?
미국과의 조율 등 여러 '관건'이 많지만 문재인 정부가 이를 정면으로 돌파한 뒤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과연 시기는 언제가 될 것인지에 대해 우선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 특사는 문 대통령에게 "이른 시일 내에 평양에서 뵀으면 좋겠다"고 밝힌 상태다.
이를 두고 미국 CNN방송은 전날 복수의 외교 소식통을 인용,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 날짜가 광복절인 8월 15일로 잡힐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일부에서는 김 특사가 타고 온 북한 전용기에서 그 시기를 찾을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김 특사를 비롯한 북한 고위급대표단이 평양에서 인천공항까지 이동하는 데 이용한 북한 전용기의 편명이 'PRK-615'라는 점을 거론하며 남북 정상회담이 오는 6월 15일을 전후로 열릴 수 있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PRK-615'는 북한을 의미하는 'PRK' 뒤에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던 6월 15일을 뜻하는 숫자 '615'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1차 남북 정상회담은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2차 남북 정상회담은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각각 진행됐다.
만약 올해 안에 3차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역대 정부 중 가장 빨리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정부로 기록될 전망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각각 정권 출범 3년, 5년 차 때 남북 정상회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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