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시간, 나는 큰 방에 앉아 책을 읽는다. 고등학생인 큰아이는 제 방에서 과제를 하는 중이고, 아홉 살 작은아이는 방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남편은 혼자 거실에 있다. 인기척이 없는 걸 보니 아마도 피곤함에 겨워 잠이 들었을 것이다. 한집에 살면서도 가족 모두가 다른 공간에서 다른 것에 심취해 있다. 익숙한 일이다. 나는 책을 덮고 목청을 높인다. "모두, 손!"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풋잠에서 깬 남편도 손을 내민다.
나는 제일 먼저 작은아이의 손부터 살핀다. 앙증맞다. 지금까지 험한 것 한 번 만져보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손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예쁜 손이다. 나는 작은아이의 손을 살포시 잡아 내 손바닥 위에 올린다. "무지개를 그리다 왔구나. 손톱 아래에 빨주노초파남보! 크레파스가 골고루 끼었네." 아이는 양 볼에 보조개가 깊게 패도록 활짝 웃는다. "씻고 올게요." 얼른 세면대로 향한다.
큰아이의 손을 살핀다. 불혹을 넘긴 내 손보다 더 커지고 있는 손이다. 보면 볼수록 흐뭇해지는 손이다. 밤이 새도록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는 손. 내가 열일곱 시절보다 훨씬 조밀한 시대를 살고 있는 탓일까. 중지손가락 마디에 굳은살이 박여 있다. 그래도 불평 한 번 않는 착한 손이다. "손톱이 좀 길지 않아?" 큰아이가 제 방으로 간다. "깎고 올게요."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손을 살핀다.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슬며시 내미는 손. 보면 볼수록 마음이 짠해지는 손이다. 나는 태연한 척 스웨터 주머니에 감춰 두었던 영양크림을 꺼낸다. 그리고는 수북이 덜어 고르게 발라준다.
서른 살 그의 손은 상처 하나 없는 손이었다. 그저 편안하게 공부만 했을 것 같은 귀족의 느낌이 났다. 보얀 손등에 비치는 푸른 혈관에서 귀태가 흘렀다. 그 손을 잡으면 나조차도 귀하게 변화시켜 줄 것만 같았다.
벌써 십수 년이 흘렀다. 어느 날 밤, 늦게 귀가해 거실에 쓰러진 채 잠이 든 남편을 깨우다 우연히 손을 보았다. 베이고, 터진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상처투성이인 그의 손은 서른 시절의 귀태 나는 손이 아니었다. 마흔 후반의 그의 손도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날 밤 아껴두었던 영양크림을 꺼내 잠든 남편의 손에 발라주었다.
볼펜대 굴려가며 승승장구하던 회사에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자신이 꿈꿔왔던 일을 시작했다. 나는 남편이 시작한 일이 탐탁잖아 아예 관심을 접었다. 그간 남편은 수시로 연고와 밴드를 요구했다. 약품함을 챙겨준 것 외엔 남편의 상처를 살갑게 살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남편은 밴드를 요구하며 잘살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고 났더니 손이 달라졌다며, 밤새 우렁각시가 다녀갔느냐고 좋아하던 그를 위해 나는 종종 잠든 남편의 손에 영양크림을 바르곤 했다.
남편의 손에 영양크림이 스며들 무렵 "다 씻었어요", "다 깎았어요" 하며 아이들이 거실로 온다. 나는 얼른 아이들 손에도 영양크림을 발라준다.
박시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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