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하빈의 시와 함께] 어떤 저녁의 풍경

#어떤 저녁의 풍경

정하해(1953~ )

저녁 술잔에 입술이 묻는다

다들 사람냄새가 난다

입을 묶은

남녀가 스마트폰을 들고, 맞은편 빌딩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골동품 같은 말을 버린 지 오래인 듯 웃는 것마저

터치로 한다

맹독이다

버려진 말의 무덤

저녁 나뭇잎이 터치를 하는 소리 바람 탓만은 아닐 것이다

무덤 짓지 않으려고

우리는 포장마차에서 소리를 방출한다

너에게 가려고 손가락을 버렸다

―시집 『젖은 잎들을 내다버리는 시간』 (시인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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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시대의 낯익은 풍경이다. 스마트폰으로 드넓은 세상과의 소통이 훨씬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들, 그리고 직장인들과의 대화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실 때도,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도 손가락은 멈추질 않는다. 입은 봉함엽서처럼 꼭꼭 접어 봉해 둔 채, 손가락 터치만 쉴 새 없이 이루어진다. 손바닥에 경배하는 족속들이다. 스마트폰 중독을 넘어 맹독이다. 말소리는 사라지고 문자만 난무한다. 말은 골동품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버려진 말의 무덤이 사방에 즐비하다.

"너에게 가려고 손가락을 버렸다."

옳거니! 가벼운 손가락을 버리고, 향기로운 입술을 취하자. 스마트폰에 손가락 지문을 남길 게 아니라, 더러는 술잔이나 찻잔에 입술 자국을 묻히자. 입술에서 묻어나는 말의 소리와 향기를 전하자. 서로 만나서 눈빛을 나누며 떠들고 웃고 욕하고 사람냄새가 나는 그런 저녁 풍경 속으로 우리 자신을 밀어 넣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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