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5일은 김팔성(가명'79) 할머니의 생일이었다. 56㎡(17평) 작은 집이었지만 평생을 고생한 돈으로 겨우 장만한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집을 장만하느라 자식들에게 좋은 신발 한 번 사주지 못했다. 30년 전 남편이 죽고 억척같이 돈을 모으며 5남매를 키웠다. 집이 없어 월세를, 전세를 전전하며 살던 1990년대. 새들도 자식들을 집에서 먹이고 키우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한스러웠다.
먼저 간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탓이다. "그래도 일을 해야죠. 직업이 있어야죠." 할머니는 63세의 나이로 우유 배달을 시작했다. 워낙 부지런하고 꾀가 많다 보니 3년 만에 150집을 확장해 1천500만원 알돈이 생겼다. 이 돈을 불려보려고 사금융업체에 맡겼다가 돈을 홀라당 날릴 뻔도 했지만, 겨우겨우 돈을 돌려받아 2002년 포항 북구 두호동에 17평 아파트를 장만했다.
나이 70이 넘자 우유 배달 일이 버거워졌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있었다.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동네 곳곳을 다니며 폐지를 주웠다. 이렇게 10여 년 만에 주택대출금 2천800만원을 모두 갚았다. '이제 드디어 자식들을 맘 편히 배불리 먹일 집이 생겼구나' 할머니는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 생일이던 지난해 11월 15일.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공포를 맞았다. 자려고 누워 있던 집에서 덜덜 떨리는 느낌이 나 '경주 지진'이려니 했다. 그러나 집이 들썩거리고 빙빙 도는 것 같더니 벽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그제야 할머니는 2층 집에서 맨발로 도망 나왔다. 굽은 허리로 제대로 빠져나올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복도를 따라 계단으로 내려올 때 넘어지며 굴러 정강이뼈를 다쳤다.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노구에 다친 뼈가 쉽게 낫지 않았다. 자식들은 장성해 모두 포항을 떠났기에 곁에서 챙겨줄 사람이 없었다. 이때부터 할머니의 임시 구호소 생활이 시작됐다.
"집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보기만 해도 배불렀던 집이 한순간에 저렇게 돼 행복이 날아가고 없구나 절망했어요." 21일 구호소에서 만난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빚도 없는 완전한 내 집이 되자마자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지진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처지가 기막혀 눈물이 떨어졌다. "꼭 집에 가려고 할 때마다 여진이 오더라고요. 매일 집을 보러 가는데 또 지진이 올까 봐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멀뚱멀뚱 보고만 옵니다. 볼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아요." 최근 집에 겨우 들어가 봤더니 보일러실 벽 갈라진 틈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전장에도 꽃은 핀다고, 할머니는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찾았다. "직업이 있어야 했어요." 할머니는 다시 폐지를 줍기 시작했다. 폐지를 주워 집을 마련했듯, 집을 고칠 돈을 마련하고자 일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힘이 났다. 신발 하나 제대로 사주지 못한 시절이 미안해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집을 고쳐보겠다는 생각에 다친 몸을 일으켰다. "자식들이 있다 해도 짐이 될 순 없잖아요."
할머니의 일상은 TV 방송에 맞춰 요가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임시 구호소에 버려진 폐지를 손수레에 모아 고물상에 판 후 구호소로 다시 돌아온다. 입구에 어지러워진 이재민들의 신발을 일일이 정리하고 나면 텐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구호소 주차장에 버려진 휴지들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린다. "폐지가 힘이 되고, 힘이 다른 사람을 챙길 수 있는 여유도 가져다준 것 같아요. 우연히 요가방송을 보며 따라 하다 보니 우울한 생각도, 불안한 마음도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아 지금은 어느 때보다 긍정적이 된 것 같습니다."
할머니가 보여준 모습은 구호소 안에서도 미담으로 돌고 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할머니의 모습이 감동적 입니다." 이재민들은 입을 모았다.
김 할머니는 "박스(폐지)를 잡고 있는 한, 저는 직업이 있습니다. 이게 저에겐 의지가 되고 위안이 됩니다. 모든 이재민들이 용기를 잃지 않길 바랍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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