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시윤의 에세이 산책] 그해, 교복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길을 지나다 현수막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교복나눔행사', 한참을 서성이다 자원봉사센터 문을 열었다. 누가 기증했는지 수많은 교복이 말쑥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왼쪽 가슴엔 이름표를 떼어낸 흔적 또는 미처 떼어내지 못한 이름들이 붙어 있었다. 누군가의 청춘의 시간들이 잠재된 듯 교복들은 참 고요했다. 누군가의 것에서 또 누군가의 것이 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교복들 사이에서 나는 지난한 시간들을 떠올렸다.

25년 전,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입학식 날 교복을 착용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넉넉하지 못했던 집안 형편이 열일곱의 나를 초조하게 했다. 새 교복을 맞춰달라는 말은 사치라는 걸 잘 아는 나였으므로,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때 불현듯 떠올랐던 건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S의 누나가 그해, 그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당장 S에게 전화를 걸어 교복을 확보해야 함이 옳았으나 열일곱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남자 동기에게 헌 교복을 구걸해야 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부끄러움을 감수해야 함이었다. 걱정과 고민은 불면으로 이어졌다. 내가 고민하는 동안 시간은 물처럼 흘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도가 없었다. 입학을 며칠 앞두고 어렵사리 S에게 전화를 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는 허례허식의 인사를 시작으로 다른 동기들은 잘 지내는지 등의 안부까지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참 번지르르하게 해댔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누나 ○○여고 올해 졸업하셨지? 혹시 교복… 버렸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글쎄? 혹시 너 그 학교 입학하냐? 누나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있음 줄까?" S는 눈치가 참 빨랐다.

늦은 밤, S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 앞인데 빨리 나와. 교복 가져왔어." 가로등 불빛 아래 S가 서 있었다. S의 집에서 우리 집까지 버스로 족히 한 시간은 되는 거리였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S가 먼저 말했다. "욕심도 많지. 무슨 교복을 두 벌씩이나 준비하냐." S는 헌 교복을 부탁하는 내가 행여 무안해할까 봐, 새 교복과 헌 교복을 교차해서 입을 요량으로 부탁하는 것처럼 여겨 주었다. 와이셔츠에 붉은 넥타이를 매고 붉은빛 체크무늬 조끼와 스커트, 재킷을 입으니 내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3년 동안 나는 S의 누나에게서 물려받은 교복으로 참 반듯하려 애썼다. 나는 어디를 가든 교복을 입었다. 비록 헌것이었지만 새로운 감정들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시절의 유일한 복장이었다.

오늘 내가 누리는 이 행복은 과거의 궁핍함과 절실함이 만들어낸 결과이리라. 행복지수는 처음부터 부유한 사람보다 결핍을 헤쳐 나온 사람에게서 더 높게 나타난다고 한다. 결핍의 시간이 결코 부끄럽고 아픈 것만이 아니라는 것은, 결핍을 이겨낸 자들만이 알 것이다.

내가 졸업하던 날, 2학년 후배가 찾아왔다. "언니… 교복 저 주시면 안 돼요? 올해 제 동생이 우리 학교에 입학합니다." 내 청춘의 시간이 실루엣처럼 스며든 교복은 누군가의 여고 시절이 되어 또다시 파릇파릇하였다.

박시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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