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편견

1년 전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앓고 있는 외국인 유학생이 질병관리본부 협조 문서를 들고 나의 진료실을 방문했다. 그녀는 이미 항바이러스제를 투약 중이었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몇 가지 주의할 점과 추후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할 것을 당부하고 진료를 마쳤다. 그랬던 그녀에게서 새 근무지로 이동한 나의 진료실로 전화가 왔다.

그녀는 피부병이 생겼다며, 전화를 통해 괴로움을 호소했다. 반짝이고 탄력 있는 피부를 가진 그녀였는데 피부질환이라니. 그녀의 기저질환을 고려해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가서 진료받을 것을 권유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내게 진료를 받겠다며 반복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새로 옮긴 진료실 위치를 가르쳐 주고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 출근하니 그녀는 주차장에서부터 날 기다리고 있었다. 1년 만에 본 그녀의 건장한 체격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고, 치렁치렁 늘어뜨려 한껏 힘을 자랑하던 레게머리는 삭발이 되어 있었다. 치료 예후가 안 좋은 것일까 하는 걱정을 하며 대화를 시작해보니,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체중 감소는 성공적인 다이어트의 결과였고, 머리는 곱슬을 펴기 위해 약품을 쓴 뒤, 알러지성 피부염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삭발한 것이었다.

그제야 안도한 나는 그녀에게 현재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고 알러지 반응을 낮출 수 있는 약물을 처방해 주었다. 그녀 역시 안심이 되었는지 활짝 웃으며 진료실을 나섰다. 다음 날 그녀는 전화로 하루 만에 증상이 호전되었다고 "갓 블레스 유"(God bless you)를 연신 외쳤다. 그런데 그녀의 진심 어린 감사 표현이 어찌나 미안하던지…. 그녀가 떠난 직후 내가 했던 행동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료 중 그녀가 머리를 긁어 떨어진 각질들을 보며, 의학적 근거가 없음에도 에이즈 바이러스를 퍼트리진 않을지 신경이 쓰였다. 두피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많아 항균 연고를 발라주었는데 상처 부위가 나에게 닿진 않았는지 괜히 걱정도 됐다. 갑자기 눈이 따가운 느낌이 드는 것이 그녀 때문은 아닌지 순간 무서운 기분마저 들었다. 곧바로 진료실을 환기하고 입고 있던 진료복을 모두 벗어 세탁기에 넣고는 샤워까지 했다. 떨칠 수 없는 불안감에 전전긍긍하다가 불현듯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편견'이라는 것은 무섭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의식을 잠식하고 행동을 조정한다. 편견이 옳지 못한 것임을 알면서도 고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의료인인 나조차도 편견에 사로잡혀 의학적 근거가 없는 걱정을 했을 정도니, 그녀가 자신의 질병을 주위에 알렸을 때 받았을 따가운 시선들은 오죽 많았을까.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이 세상살이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편견이야말로 무서운 질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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