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9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선교로 시작된 일본 가톨릭의 역사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인해서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뒤이어 도쿠가와 막부가 박해를 가한 결과, 가혹한 탄압과 세금의 이중고를 견디다 못해 4만여 천주교인들이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가 학살되고 만다. 시마바라의 난이라 불리는 이 봉기로 인해 박해는 극한으로 치닫게 되었고, 가톨릭 신앙인들은 지하로 숨어서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고자 했다. 이들을 일컬어 '가쿠레 키리시탄'(숨은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당시 순교자 중의 한 사람인 '바스찬'은 7대가 지나면 신앙의 자유를 얻으리라 예언했는데, 이 예언처럼 250여 년이라는 박해의 시간을 견뎌낸 가쿠레 키리시탄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 1865년의 일이었다. 일본 당국이 개항을 단행하면서 외국인들을 위한 성당 건축을 허가하자, 파리 외방전교회의 쁘띠쟝(Bernard Thadée Petitjean) 신부는 나가사키의 언덕 위에 오우라 천주당(현재 정식 명칭은 일본 26성 순교자 천주당)을 지어서 숨어 살던 그리스도인들을 불러내고자 했다. 하지만 워낙 길고 가혹한 박해를 겪은 탓인지 찾아온 일본인들이라고는 서양식 성당을 보러온 구경꾼뿐이었고, 쁘띠쟝 신부도 낙담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던 1865년 3월 17일, 이사벨라 유리와 가족을 비롯한 십수 명의 가쿠레 키리시탄들이 천주당을 찾아왔다. 경계심을 풀지 못한 그들은 구경꾼을 가장한 채 쁘띠쟝 신부에게 다가와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먼저 성모님을 공경하는지, 사제가 결혼했는지, 끝으로 '슬픈 시기'를 지내는지 물었던 것이다. 이에 쁘띠쨩 신부가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제는 결혼하지 않으며 '슬픈 시기'를 지낸다는 점을 확인해 주자, 비로소 가쿠레 키리시탄들은 '저희 마음도 신부님과 같습니다'라며 신앙을 드러내고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가톨릭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핵심 질문이 '슬픈 시기'의 준수 여부에 달려 있었던 셈이다.
가쿠레 키리시탄들이 말하는 '슬픈 시기'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서 사순 시기를 말한다. 사순 시기는 말 그대로 40일간의 성찰과 회개의 때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 전 40년을 광야에서 떠돌며 정화의 과정을 거쳤던 히브리 사람들처럼, 그리고 40일간 광야에서 유혹과 맞서며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였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순 시기 동안 거짓으로 감출 수 없는 광야의 삶을 자처하면서 거룩한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과연 가리지 않은 인간의 민낯을 보는 일은 슬픈 일이다. 허세와 거짓으로 분칠되어 있는 일상을 파헤쳐서, 그 두터운 위장막 아래에 숨어 있는 뒤틀린 욕망과 이기심의 깊은 상처를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숨기려고 허세를 부리거나 남 탓을 하고 분노하는 악습 속에 있다. 그렇게 죄와 죽음으로 한계 지어진 자신을 보는 일은 인간에게 슬픈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순 시기를 슬픈 시기로 지내는 참뜻은 단지 자기 연민과 비관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데 있지 않다. 천주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인간의 죄와 죽음을 대신 떠맡는 것으로 이해했고, 따라서 스승의 모범을 따라 세상의 죄와 고통을 대면하는 것을 제자 된 도리로 삼았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죄와 고통과 죽음은 분노와 책임 전가의 계기가 아니라 연민과 연대의 계기였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하고 연민하며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은 천주교식으로 말하자면 빠스카의 신비를 삶 속에서 체험하는 첫 단계이다. 그리스도인은 남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슬퍼할 줄 알고, 남을 위해 대신 울어줌으로써 구원의 희망에로 나아간다. 이웃의 고통에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면, 구원은 요원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런 슬픈 시기를 지내고 있는가.
박용욱 신부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 윤리학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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