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인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인연을 위해 곡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며 글을 썼다. 슈만의 클라라, 고흐의 티오, 피천득의 그녀 아사코까지…. 아직 인연을 논하기엔 젊은 나이지만 내게도 인연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7년 전 어느 여름, 한라산을 등정한 일이 있었다. 빠르게 등정을 마치고 얼른 하산하여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할 생각으로 숙소에서 달랑 물 한 병만 챙겨서 출발했다. 내가 선택한 '성판악-관음사' 코스는 첫 시작이 넓고, 평지로 느껴지게 하는 계단식 길이어서 나같은 초보자가 백록담까지 등정하기엔 더없이 좋았다.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파란하늘과 평탄한 등산로에 힘을 얻어 뛰다시피 속도를 내며 등정을 하였더니 어느덧 마지막 쉼터가 나왔다. 아직은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그곳에는 긴 꽁지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청년만이 쉬고 있었다. 그와 잠시 눈이 마주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목례로 격려를 하고는 각자의 산행을 다시 시작했다.

드디어 백록담. 입산 때부터 작동되었던 타이머는 3시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보통 9시간 걸린다는 등정 시간을 6시간 안으로 단축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산 길에는 영 다리가 더디게 움직인다. 시간을 단축한답시고 시작부터 뛰어오른 탓인지 조금 가쁘던 숨은 거의 쉬기 힘들 정도로 헐떡거리게 되었다. 더운 날씨와 무관하게 한기가 들며 팔다리가 떨리고 어지럽기 시작했다. 당뇨 환자들이 가끔 호소하는 경우가 있는 저혈당 증상인 것 같았다. 무얼 먹어야 할 텐데 하면서 힘들게 한 걸음씩 옮겼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가? 깨어나 보니 등산로 중간에 있는 나무의자에 곱게 누워 있었고 휴게소에서의 그 꽁지머리 청년이 마치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본능적으로 먹을 것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는 선뜻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과자 꾸러미를 내어주고 나를 하산 지점까지 부축하여 택시까지 손수 잡아 숙소 앞에 떨어뜨리고는 홀연히 떠났다.

하산 길에 우리는 통성명과 서로의 신상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당시 정신없던 나의 상태 때문인지 어렴풋한 그의 얼굴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 후 산행을 할 때면 '일용할 양식'을 넉넉히 챙기며 한라산에서 만났던 그 생명의 은인(?)을 떠올리곤 한다. 이따금씩 산에서 만나는 꽁지머리의 등산객을 보면 혹시나 그인가 돌아보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연에 대한 첫 성찰을 하는 계기가 혼인이라고 하는데 나의 경우 한라산 등정에서 만난 구세주 덕분에 인연의 의미를 곰곰이 새겨보게 된다. 산에서의 인연, 내가 받았던 그 도움처럼 언젠가 누군가를 도울 날이 생긴다면 그것이 나와 그 꽁지머리 청년과의 소중한 인연의 결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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