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그의 평생 은인이었던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과 안희정 당시 국정상황실장이 저녁 자리를 같이했다. 그때 대통령이 안 실장에게 "정치하지 말고 농사를 지으라"고 했다. 안 실장은 대답없이 눈만 껌뻑거렸다. 다음 모임에서도 같은 상황이 연출됐다. 대통령의 말과 표정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2013년 출간된 '강금원이라는 사람'에 나오는 대목이다. 우여곡절 끝에 복역을 했던 안희정은 출소 이후 모시던 주군의 진정 어린 권유에도 불구하고 정치 행보에 나섰고, 재선의 충남도지사가 됐다. 지난해 대통령선거 때 더불어민주당 경선 과정에서는 국민 화합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고 성공한 정치인이 되는 듯 보였다.
그런 그가 하룻밤 사이 성폭행범으로 전락했다. 민주당은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그를 출당'제명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런 사태를 예견했던 것일까. 5일 밤 뉴스를 시청했거나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를 지지했건, 싫어했건 국민들은 믿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그는 진영 논리를 떠나 국민들을 어루만질 수 있는 '따뜻한 정치인'의 이미지를 심어줬다. 그래서 그의 추문을 전해 들은 사람들 다수의 반응은 처음엔 "정말이냐"는 것이었다. 사실임을 확인하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환멸로 분노하고 있다.
그의 정치 인생은 이제 막을 내렸다. 6일 도지사를 사퇴한 그가 재기할 가능성은 단언컨대 제로다. 충남경찰청이 성폭행범으로 수사를 시작했으니 그는 어쩌면 차가운 감방 신세를 져야 할 수도 있다.
진보가 외견상 내세우는 가장 큰 덕목은 정직과 도덕성이다. 진보 진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수 쪽보다 더 엄격한 잣대가 적용된다. 안희정은 진보가 더 깨끗할 것이라는 국민들의 인식에 난도질을 해버렸다. 차라리 극좌나 극우 진영 인사였다면 '사회의 일탈자니까'라며 일말의 이해라도 했겠지만 그는 좌우를 보듬을 수 있는 포용적 인물이어서 상실감이 더 크다.
안희정이라는 대형 재료로 인해 3개월 뒤 지방선거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됐다. '자유한국당 필패' 분위기의 급격한 변화를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안희정을 내세우며 민주당 간판을 달고 충남도지사 선거운동을 하던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이 6일 선거운동 잠정 중단을 선언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5일까지도 '안희정의 친구'가 당선의 바로미터였는데, 불과 몇 시간 뒤 '분노'로 바뀔 조짐을 감지한 것이다.
이는 비단 충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전국적 사안으로 급부상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지지율에도 엄청난 악영향이 예상된다. 홍준표 대표가 대학 시절 '돼지 발정제' 얘기를 했다고 해서 그가 이끄는 자유한국당을 향해 성추문정당이라고 매도했고, 그로 인한 반사이익을 지지율로 보상받은 게 민주당이다. 그런 정당의 차기 대권주자 중 한 명이 현직 도지사 지위를 이용해 수행비서를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해왔다. 행사장에서 미투운동 지지 발언을 한 당일 저녁에도 거부하는 비서에게 몹쓸 짓을 했단다. 최고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의 정점에서, 권력을 이용한 성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을의 항거가 불가능한 것을 알고서 저지르는 갑의 성폭력은 가중처벌돼야 한다.
이제 미투운동은 정치권으로 향하고 있다. 여의도에는 안희정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프로들이 많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국회의원을 지낸 작가 전여옥은 "그들은 아마 쉴새 없이 머리를 돌리며 '성폭력이 아니라 성매매였다'는 대사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다시 국민들에게 상실감을 안겨줄 자들이 얼마나 나올 것인가.
안희정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조언을 들었더라면 이렇게 나락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포항 찾은 한동훈 "박정희 때처럼 과학개발 100개년 계획 세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