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남성들 자기방어 '펜스 룰'…"구설 오를까 악수 안해요"

최근 격려차 부서 회식 자리를 마련한 대구시 고위 공무원 A(55) 씨는 일부러 여성 직원과 멀리 떨어져 앉았다. 워낙 민감한 시기다 보니 괜스레 구설에 오를까 걱정해서다. 남성 직원들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회식 자리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남녀가 마주 앉는 모양새가 됐다. A씨는 "처음엔 분위기가 어색해서 '우리끼리 남북회담하는 거냐'며 농담을 하기는 했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요즘은 여성과 악수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고 털어놨다.

지역에서도 이른바 '펜스 룰'(Pence Rule)을 따르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 펜스 룰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하원 의원이던 지난 2002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아닌 여성과는 단둘이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펜스 룰은 여성과 마주치는 자리조차 피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직원과는 단둘이 대화를 나누지 않고, 업무상 회의는 가능하면 SNS로 하며, 회식 자리는 남성들만 갖는 식이다.

펜스 룰은 새 학기를 맞은 대학가에서도 감지된다. 학생들은 신입생들에게 술과 장기자랑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남성 교수는 여학생과 단둘이 상담하기를 피한다. 8일 한 SNS에는 대구 한 대학교 남학생들이 택시를 합승할 사람을 구하면서 함께 타기를 원하는 여학생은 거절했다는 내용이 올라오기도 했다.

기업들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특히 금융'유통업계는 유난히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업종의 특성상 여직원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1'1'9'(회식은 한 가지 술로 1차만 9시까지)가 사내 회식 불문율로 자리 잡고, 술 대신 영화'뮤지컬 관람 등을 즐기는 문화 회식도 늘고 있다고 했다"고 했다.

한 유통업체는 공식적인 지침은 없지만, 미투 운동 이후 스스로 알아서 조심하라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많다고 전했다. 업체 관계자는 "과거엔 여직원 회식에 상급자가 가서 계산도 해주고 격려해주는 분위기였다면 최근에는 아예 참석하지 않거나 돈만 내주고 간다. 과연 조직 관리에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라며 씁쓸해했다.

대구 수성구 건설업체 A대표는 지난주 회식에서 직원들과 술자리 대신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먹고 볼링장을 찾았다. 이 업체는 직원 절반가량이 여직원이다. A대표는 "젊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고자 회식 자리에서 실없는 농담도 종종 했는데 지금은 아예 안 한다. 잘못 해석될 여지가 있는 말은 아예 삼간다"고 했다.

성서산업단지의 자동차부품회사는 퇴근 후 회식 자리를 없앴다. 남자 직원들끼리 따로 회식을 하는 '펜스 룰'조차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해당 업체는 2주 전부터 저녁 회식을 점심시간으로 옮겼고, 반드시 전할 이야기가 있으면 오후 3시에 티타임을 갖고 있다. 아침마다 막내 여직원이 커피를 타오는 것도 없앴다.

한편 여성들은 펜스 룰이 또 다른 성차별을 낳을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여성을 배제하는 것보다는 대등하고 합리적으로 교류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강우진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펜스 룰의 본 고장인 미국에선 남녀를 구분 짓기보다는 서로 동등한 지위로 인정하고 업무 효율성을 강조한다. 한국 사회는 남녀 간 불균형한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차별이 많아 문제가 됐다. 잘못에 책임지는 사회문화를 확립하고 관련 제도를 개선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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