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경이 낳은 호국 인물] <상> 운강 이강년 선생

서대문형무소 항일 순국 사형수 1호

문경 이강년 기념관에 있는 선생의 동상
문경 이강년 기념관에 있는 선생의 동상

대한민국 의병의 날 행사가 올해 6월 1일 문경에서 열린다.

행정안전부는 올해 '제8회 대한민국 의병의 날' 행사를 대한민국 의병 영웅인 운강 이강년(1858~1908) 선생의 고향인 문경에서 개최키로 했다. 올해는 이강년 선생의 순국 110주년을 맞는 해이다.

문경은 이강년 선생뿐 아니라 대표적인 항일투사인 박열 의사도 배출한 곳이다.

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룬 신태식, 민순호 선생과 영화 '밀정'의 주인공 황옥 경부도 '문경인'이다.

임진왜란 당시 주민들의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담은 의병일기도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문경은 운강 선생과 박열 의사 등의 호국정신을 새 시대정신과 문경의 얼로 계승시켜 지역발전의 혼으로 삼아야 한다는 시민 여론이 높다.

매일신문은 대한민국 의병의 날 행사를 앞두고 문경의 대표적인 호국 인물인 이강년 선생과 박열 의사를 2회에 걸쳐 재조명한다.

◆문경의 얼, 운강 이강년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서야 삶을 어찌 구하려 하나만 오랑캐 쳐부술 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 한말 의병 영웅 운강 이강년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남긴 옥중 시다.

선생은 1858년 12월 가은읍 도태리(상괴1리)에서 태어났다. 조선 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의 19세손으로 호는 운강, 자는 낙인이다. 또한 태양이 어머니의 입으로 들어가는 꿈을 꾼 뒤 잉태되었다 해 아명을 양출(陽出)이라 했다.

운강은 22세 때인 1880년 고종 17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종 6품 선전관이 되었다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목도하면서 정국 혼란과 친일파의 행동에 격노, 벼슬을 버리고 낙향, 학문에 매진했다.

하지만 어지러운 나라 사정은 운강을 결기케 했다. 운강이 격동의 역사무대에 나선 첫 번째 계기는 1894년 동학농민항쟁과 청일전쟁, 1895년 국모인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이어지는 국가변란의 소용돌이 속이었다. 이러한 국난에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고자 1896년 2월 가은 도태장터에서 척왜양이(斥倭洋夷)의 깃발을 올렸다. 그 후 운강은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라는 국망의 위기 속에 침략자 일본군에 맞서 항일 의병전쟁이라는 전면전에 나서게 된다.

운강의 의병부대 전투는 1907년부터 제천, 충주, 단양을 중심으로 경북 문경, 영주, 봉화, 강원도 영월, 태백, 강릉, 경기도 가평 등 소백산과 태백산, 설악산, 화악산 줄기를 따라 광범한 지역에서 전개된 일본 군경과의 대규모 유격전이었다.

운강은 한말 의병전쟁사에서 탁월한 지도력과 용맹심으로 일제에 막대한 타격과 손실을 주었다. 그는 1908년 7월 청풍 작성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서울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돼 이후 재판을 받았고 그해 9월 23일 사형을 선고받아 10월 13일 오전 10시 51세의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운강은 순국하기 전 아들과 전국의 의병들에게 글을 남기기도 했다.

"너의 아비는 평생 혈충을 품어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하였다. 이제 뜻대로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랴. 너는 놀래지 말고 정신을 차려 동생들과 함께 나 죽은 뒤 3일 안으로 박장(薄葬)토록하라…(중략) 이 몸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대의에 죽는 것이니, 하루를 더하더라도 그치는 것보다 낫다는 것도 이제는 마지막이 되었다.…(중략) 동지들에게 바라는 것은 적세가 성하다 하여 본래의 뜻을 어기지 말고 더욱 큰 의리로 매진하시어 광명한 날을 기다리시라."

선생의 아들 3형제 역시 아버지 운강의 뒤를 이어 의병항쟁에 나섰다. 장남 승재는 건국훈장 애국장, 2남 긍재는 건국훈장 애족장, 3남 명재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가산을 정리해 운강의 의병항쟁을 적극 도운 4촌 동생 강수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고종의 밀지를 받은 비상사령관

"운강 선생은 서울 전쟁기념관에 이순신, 을지문덕, 강감찬 장군 등과 함께 대한민국 의병장으로는 유일하게 흉상이 모셔져 있는 분입니다."

운강 이강년 선생 순국 11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현한근 공동위원장은 "운강 선생이 1907년 정미의병 때 전국 각도의 의병장으로부터 의병장 서열 1위인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됐다"며 "고종의 밀지를 받아 도제찰사도 겸임했다고 알려졌는데, 도제찰사는 국가의 군권을 장악하는 비상사령관으로 서애 류성룡 선생이 임진왜란 때 영의정과 겸임을 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자리였다"고 설명했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도제찰사와 도창의대장을 겸임한 인물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운강 선생이 유일하며 일본군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의 순국 사형수 1호라는 사실도 결코 후손들이 간과할 수 없는 대표적인 항일역사"라고 소개했다.

고 시장과 현 위원장은 "운강 선생의 일대기를 뮤지컬이나 연극, 영화로 제작하고, 문경 전승유적지 복원, 선생이 직접 만든 의병전술서 '속오작대도' 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유물을 문경으로 가져오는 일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선생은 고향 문경이 아닌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에 모셔져 있다. 선생이 순국하자 상주 화북 유림들이 나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선생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충북 제천으로 몰래 옮겨 가매장했다가 1910년 지금의 상주 입석리 묘소로 모셔왔다는 것.

이에 운강 선생 기념사업회와 유족들은 선생의 묘소를 문경으로 이전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