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창단 영주 중견 극단
각자 생업 하면서 무대 올라
수능 앞둔 고3들처럼 맹연습
"환갑 넘어도 연기할 겁니다"
연습이랬다. 관객은 없었다. 차지게 욕을 해댔고, 한 맺힌 울음을 토했다. 배에서 끌어올린 소리, 전문용어로 '발성'에 연습장 안은 쩌렁쩌렁했다. 치고 받는 대사들이 연습실 안을 메아리치듯 퍼져 튀어 다녔다.
복덕방 사장과 며느리의 관계를 불륜이라 오해한 시어머니의 대사에선 악취마저 풍겼다. "저승서 똥통에 빠질 것이여"인지, "저승서 똥독을 맞을 것이여"인지 불명확해도 저주의 메시지는 귀에 착착 감겨 명확하게 전달됐다. 표독스러운 표정과 말투, 레이저 눈빛에는 온 우주의 기운이 담겨 있는 듯했다.
◆수험생이냐, 동호인이냐
이미 여러 차례 맞춘 호흡이었다. 하긴 이곳은 1983년 창단한 영주의 중견 극단 '소백무대'의 연습실. 게다가 지금 연습하고 있는 '소나무 아래 잠들다'는 지난해 연말 무대에 올렸던 작품이었으니.
그런데도 중간중간 대본과 다르게 진행되는 것들은 뭐였을까. 연극의 '현장성' '일시성'이란 말은 연극학과 입시 용어가 아니었다. 단원들은 연습을 하면서도 시시각각 분위기를 바꾸고 대사를 고쳐나갔다. 극에서 아낙 역을 맡았던 금재남(44'여) 씨의 대본집을 들춰봤다. 정말이지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연습을 도대체 얼마나 많이 한 건지 대본집은 너덜너덜하다 못해 헌책방에서도 안 사갈 정도로 해져 있었다. 대사를 보려고 대본집을 펼치자 흡사 대입수능을 앞둔 고3 학습지에 견줘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대본집으로 시험을 치나 싶을 정도였다. 형광펜 칠은 기본이요, 밑줄, 동그라미, 심지어 억양 표시까지. "시험에 꼭 나오니 받아적으라"는 선생님 말씀을 착실히 받아적은 듯 '액션 과하게'라는 말도 깨알처럼 적어뒀다.
◆동호인이냐, 전문배우냐
극단 '소백무대'는 전문배우, 그러니까 연극무대를 밥벌이 삼는 이들은 아니었다. 각자 생업을 하며 무대에 올랐다. 식당 운영자, 전 담배회사 직원, 음악교사, 파티시에 등 각자의 일은 정기적이었고, 전문적이었다. 그래서 프로 연극배우라고 보기도 애매했다.
"우리 무대를 보러 오는 관객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 글쎄, 매우 좋아하는 취미라고 말하기도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며 최경희(53'여) 씨가 애매한 듯 갸우뚱거렸다. 그의 애매한 표현은 적절했다. 매우 좋아하는 취미로 보기엔 이들의 공연 역사는 너무 길었다. 20년 안팎의 경력에 출연 작품수도 30편 안팎이라니. 단지 취미라고 하기엔 너무 장기적이고 열정적이었다.
"연극에 100% 만족은 없다. 만족하지 못함에서 나오는 게 연극의 매력이다. 이번 무대를 끝으로 다시는 안 한다고 말할 때도 있지만 나도 모르게 대사를 읊고 있는 걸 보면 사이비종교 못지않다"는 엄성필(56) 씨의 말에서 '사이비종교'라는 단어가 유독 귓전을 때렸다. 오랜 열정의 열쇳말처럼 들렸다.
'소백무대' 단원은 18명 정도. 늘 20명 안팎을 유지했다. 그중 가장 알려진 사람은 1980년대 중반 함께했던 배우 이성민이다. 단원 대부분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같은 배우가 되기 위해 도전해보진 않았느냐고 묻자, "각자의 도전 방식과 길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영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연극의 최종 목표가 '유명세'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해놓고 보니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아니, 지역사회 예술인
이들은 철저히 지역의 일부로 살아가려 했다. 고민하고 있는 것도 지역과 관계된 것이었다. 어떻게 극단을 키워서 중앙무대로 진출하느냐가 아니었다. 심순영(56'여) 대표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발굴도 많이 됐고 큰 공연이 늘었다. 과거에 비해 연극 환경이 아주 좋아졌다. 하지만 젊은 사람은 줄었다.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했다.
나이 사십을 훌쩍 넘긴 이들이 고3 수험생만큼 열심히 대본을 고치고, 극단 연습장을 찾아 수십 번 연기를 고치고, 환갑이 넘어도 무대에 설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이들은 지역에 녹아들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었다. 저변 확대는 물론 연극에 관심이 많은 이들과 교류하기 위한 워크숍이 그중 하나였다. "연극은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볼 수 있는 기회잖아요. 춤, 소리, 연극놀이 등을 즐기듯이 가볍게 할 수 있도록 짜뒀어요."
참, 이들이 심각하게 연습하던 그 작품 '소나무 아래 잠들다'는 25일 영주시민회관에서 공연된다. 경북연극제 예선을 겸한 무료 공연이다. 문의: 극단 소백무대 심순영 대표 010-4801-5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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