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대구의 봄과 매향

매화 잔가지는 혹한에도 잔뜩 푸르고, 만설에도 탱글탱글한 꽃망울을 팡팡 터트린다.

대구수목원 영춘화는 두루뭉술 헝클어진 줄기에도 붉은 껍질 덧씌운 노란 꽃망울 넝쿨 겨드랑이에 꽉꽉 채우고, 안지랑골 왕굴 가까이 귀룽나무도 참새 부리만큼의 신초에 초록 쑥쑥 밀친다. 거기 음지 쪽 눈 덮인 땅바닥 헤집고 제 발로 껍질 박차는 도토리 또한 꼬부랑 발부리 노랗게 뻗는다. 팔공산 가산산성 복수초도 노랗게 봄을 휘휘 저어대면, 잔설에 힘입은 매화는 어디든 희고 붉은 꽃망울 터트려서 누구든 반길 대구의 봄은 정녕 향기로 오고 있다.

성불산 자락 어느 집 정원에서 12월에 꽃 피우던 목서, 그 향기 골목골목 누볐는데, 법이산 산 비알의 매화는 비단 한 그루라 할지라도 엄동을 버텨서 포효할 것이다. 그 향기 산천을 휘휘 돌 테면, 팔공산 송광매원 토종 매나 인흥사지 삼층석탑 앞 홍매나 꽃향기로 앞다퉈 사람 마구 불러댈 것이리라.

예로부터 매화를 즐겼던 조상들은 식물과 다른 영역과도 조화롭게 결합시켰으니 초화로는 수선화, 국화, 연꽃, 난초가 되고, 목본으로는 소나무, 대나무가 된다. 동물 영역으로는 백로가, 고체물로는 수석이, 기후적인 자연의 모습에는 하얀 눈을 아우르게 해서 덧보였다.

그런 나머지 세한삼우(歲寒三友), 삼청(三淸), 삼백(三白), 사애(四愛), 사우(四友), 사군자(四君子), 오청(五淸) 따위로 이름 묶어 덕목으로 삼았으니, 엄동설한을 견뎌낸 강인한 모습, 굽히지 않는 기개, 좋은 벗, 사계의 자연 질서 등 이 모두 겨우내 푸른 가지는 물론 남달리 앞당겨 꽃 피우는 모습과 거기서 흘러내리는 향기, 게다가 꽃의 색상이 모태가 됐을 법하다.

모두 매화를 포함해서 세한삼우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삼백은 하얀 눈과 백로, 삼청은 대나무와 돌인데, 소나무와 난초를 더해 오청이 된다. 사우는 난초와 대나무와 소나무가 되고, 사군자는 사우에서 소나무 대신 국화가 들어가며, 사애는 또 난초, 연꽃, 국화가 된다.

매화라면 단연 지리산 자락이 선두일 테고, 섬진강변 하동과 광양 그리고 진주, 순천, 화순, 해남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가 명성이 높지만, 특히 지리산 자락 산청군의 오래된 고매가 으뜸이리라. 단속면 운리에 있는 단속사지의 600여 년 된 정당매는 워낙 오래돼 부식과 삭아짐이 반복됐지만 외과 수술로 밑자리서 용케도 새 줄기가 돋아나 건장하고, 거기 동·서 두 탑을 앞에 두고 정당매각 곁에서 하얀 꽃 피우며, 마을에는 자손목도 함께 두고 있다. 시천면 사리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의 산천재 경내에도 선생이 직접 심은 500여 년 된 고매가 연하게 붉다.

순천 선암사 무우전과 팔상전 주위 선암 고매보다 더 멋진 모습은 보지 못했다. 담장 곁에 400여 년의 홍매가 수십 그루다. 한 그루는 550여 년으로 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언젠가 때 맞췄을 때 고매가 자아내는 희고 붉은 꽃향기는 조계산을 뒤덮고도 남음이 있었고, 구례 화엄사 각황전의 500여 년 홍매는 검정에 가까워서 흑매라 하는데 거기에 잔뜩 홀리기도 했다.

대구에는 매화나무 매(梅)자를 붙인 지명이 여럿 있다. 동구 상매동과 매여동, 북구 매천동, 수성구 매호동과 신매동, 달성군 매곡리가 그러하다. 하지만 매화나무와 관련해 직접적으로 전하는 유래는 보지 못했다. 그래도 대구의 봄은 동네마다 희고 붉은 꽃향기로 다가온다.

'영미, 영미, 영미!'를 외치던 자랑스러운 평창동계올림픽과 인간 존엄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동계패럴림픽도 끝났고, 성화도 꺼졌다. 이제 본연에 열중할 때다. 대구의 봄은 그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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