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주변 항상 눈'구름 흩날려
연기 뿜는 산 '엘 찬텐'으로 별칭
캠핑 장비 빌려 1박 2일 트레킹
일출에 붉게 빛나는 봉우리 장엄
길이 30㎞ 폭 5㎞ 모레노 빙하
얼음에 위스키 부은 언더락 즐겨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마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3시간 후 '엘 칼라파테'에 도착했다. 공항버스를 타고 마을로 진입하는데 도시가 마치 차가운 하늘색 필름을 끼워놓은 것처럼 푸르스름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었다. 차창 밖으론 뿌연 옥빛의 아르헨티노호가 보였다. 엘 칼라파테는 아르헨티나 남부 산타크루스주에 있고 인구 2만2천 명의 소도시다. 이곳은 페리토 모레노 빙하와 피츠로이산을 만나기 위해 잠시 들르는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다. 엘 칼라파테에서 머물 숙소는 6인실의 도미토리였다. 듣던 대로 숙박비가 제법 비쌌다. 예림이는 피곤했는지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었고 난 혼자 숙소에서 나와 마을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꽤 지나 숙소로 돌아왔는데 밤 9시가 되어도 해가 하얗게 떠 있었다. 생애 처음 겪어본 백야였다.
우린 파타고니아에서의 캠핑을 앞두고 하루는 푹 쉬기로 했다. 다음날은 햇살이 좋았다. 자전거를 빌려 동네 구경을 했다. 동화 속 작은 마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이곳은 집집마다 낮고 귀여운 울타리가 처져 있고 마당엔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나무와 풀들은 하나같이 동그랗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마을의 중심에서 살짝 벗어나면 탁 트인 길옆으로 끝없는 아르헨티노호가 함께한다. 이 작은 마을은 가는 곳마다 완전히 다른 풍경들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어떤 곳은 엄청 큰 나무들이 가로수처럼 무심히 심어져 있고, 어떤 길은 허리까지 오는 파란 갈대 같은 풀들이 부드러운 머릿결처럼 바람에 휘날렸다. 정말 요정들이 살 것 같은 예쁜 마을이었다.
◆붉은빛 피츠로이산에서의 레드와인
파타고니아의 첫 번째 일정은 '피츠로이산' 캠핑이었다. 우린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했다. 짐은 미리 싸뒀고 1박 2일 동안의 식사를 후다닥 만들었다. 전날 호스텔 파티에서 남은 소시지로 볶음밥을 했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부랴부랴 준비해서 아침 7시쯤 버스에 올랐다. 피츠로이산이 있는 '엘 챤텐' 마을까진 3시간 남짓의 거리여서 잠시 눈을 붙였다.
피츠로이산은 거대한 빙하들 위로 뾰족하게 솟은 산이다. 해발 3,400m로 남부 파타고니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가진 이 산은 험악한 기후와 거센 바람으로 1952년까진 사람이 오를 수 없는 봉우리로 알려져 왔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피츠로이산을 실제로 오른다기보다는 봉우리를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곳까지 가는 것이 주 목적이다.
산봉우리 주변으로는 구름과 눈이 항상 흩날려서 최초로 이곳에 정착한 원주민들은 피츠로이산을 '엘 찬텐'(연기를 뿜는 산)이라고 불렀다. 그 후에 이 산을 발견한 모험가가 다윈과 함께 비글호를 항해했던 피츠로이 선장을 기리기 위해 산 이름을 '피츠로이산'으로 불렀다. 그리고 엘 찬텐은 피츠로이산 밑 작은 마을의 명칭이 되었다. 엘 찬텐은 가로 세로 20블록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작은 도시다. 마치 피츠로이산 트레킹을 위해 만들어진 도시 같았다.
우리는 엘 찬텐에 도착하자마자 캠핑 장비를 대여하러 다녔다. 장비를 빌려주는 곳이 없어 3시간 넘게 마을을 헤매다 간신히 2인용 캠핑 장비를 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오후가 되어서야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두 시간쯤 걸었을까. 눈부시게 맑은 호수를 품고 있는 카프리 캠핑장에 도착했다. 텐트를 치고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시리얼을 꺼내고 엘 찬텐에서 사 온 우유를 뜯었다. 그런데 별안간 우유에서 새빨간 물이 튀어나왔다. 예림이와 난 적잖게 당황했다. 젖소 그림이 그려진 종이갑에 들어 있어서 당연히 우유라고 생각했는데 맛을 보니 와인이었다. 우린 참으로 로맨틱하게도 1ℓ짜리 와인을 사서 산을 오른 것이다. 너무 황당해서 한참을 웃다가 결국 시리얼을 안주 삼아 호수 옆 바위에서 1ℓ의 와인을 모두 마셨다. 배도 부르고 햇볕은 따뜻하고 금세 노곤해져서 둘 다 잠이 들었다. 4시간쯤 흘렀을까. 예림이가 텐트 안에서 자자며 날 깨웠다. 몸부림이라도 심하게 쳐서 호수에 빠졌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 와인 덕분(?)에 엄청나게 일찍 숙면을 취해서 우린 다음 날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날 수 있었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로스 트레스 호수'를 향해 걸어갔다.
피츠로이산은 듣던 대로 정말 아름다웠다. 엽서 사진 같은 풍경들이 끊임없이 내 앞에 나타났다. 해가 떠오르고 뾰족한 피츠로이 산봉우리가 햇빛에 반사되어 대장간의 달군 쇠처럼 날카롭고 발갛게 빛났다. 그 광경은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아직 완전히 해가 뜨지 않은 하늘의 푸른색과 붉은 주황색, 숲의 초록색의 대비가 너무 아름다웠다. 이것이 우리가 당일 코스로도 가능한 이 트레킹을 산에서 하루 자기로 선택한 이유였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도 식후경!
엘 챤텐에서 돌아오고 바로 다음 날 페리토 모레노 빙하 투어를 했다. 모레노 빙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빙하로 정평이 나 있는데, 30㎞의 길이에 폭이 5㎞, 높이가 60m나 되는 거대한 빙하다. 서쪽에 있는 안데스산맥에서 1년 중 360일간 거의 매일 내리는 비와 눈이 쌓이고 축적되면서 빙하가 되어 바다로 밀려 나와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빙하가 되기까지는 300년에서 400년 정도 걸린다고 하니 시간의 위대함 앞에서 잠시나마 숭고해졌다.
투어는 오전 동안 진행되었다. 엘 칼라파테에서 버스를 타고 모레노 빙하로 이동하는데 버스가 전망대 바로 앞까지 간다. 모두의 편의와 자본주의적 이익을 위한 것이겠지만 이런 위대한 자연경관을 너무 쉽게 접하는 건 어딘가 모르게 김이 새는 느낌이다. 끝이 안 보이는 거대한 규모의 모레노 빙하는 옅은 소다색을 띠고 있었다. 제각기 다른 빙하의 모양과 영롱한 빛깔에 취해 있는데 엄청난 소리와 함께 빙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빙하 위를 걷는 투어를 위해 일행들은 배를 타고 이동했다. 빙하 투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미니 트레킹과 빅아이스 트레킹이 있다. 둘 다 전망대에서 빙하를 관람하고 빙하 위를 걷는 투어인데, 미니 트레킹은 1시간 30분을 걷고 빅아이스 트레킹은 4, 5시간을 걷는 트레킹이다. 빅아이스 트레킹을 하고 싶었지만 비용이 너무 비싸서 미니 트레킹을 선택했다. 미니 트레킹도 한화로 20만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트레킹이 가능한 빙하에 도착하면 아이젠을 신발에 차고 안전요원의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한 사람씩 줄을 지어 차례로 이동한다. 빙하 위는 외계 행성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빙하 사이의 끝없이 깊은 구멍들 옆을 지나갈 때면 살짝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빙하 트레킹에서 느껴지는 건 이 정도뿐이었다. 빙하 위를 걷는다는 신비로움 정도(?)였다. 뭔가 빙하 위에서 극적으로 멋있는 뷰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마냥 빙하를 걷기만 하는 그 자체가 그렇게 재밌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중에도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건 '빙하의 맛'이다. 바닥에 몸을 바짝 붙여 마신 빙하수의 달콤함과 투어가 끝날 때쯤 빙하를 깨서 위스키를 부어 언더락으로 마신 그 맛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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