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삭봉회

"삭봉회? 그게 뭔데요?"

알쏭달쏭한 그 이름을 처음 듣고는 뭔가 하고 한참을 생각했다. 어감이 약간 촌스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럽다. 설명을 듣고서야 아~ 그거? 했다. 그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불쌍(?)하기까지 했다.

지인이 일하는 회사에서는 몇 년 전부터 일찌감치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있단다. 올 연초에도 해당하는 직원들을 한자리에 모아 제도에 대해 알려주는 설명회를 간단하게 열었다.

한 일터에서 일하지만 평소 만날 일이 별로 없던 '노장'들이 서로 인사를 하고 '졸업을 앞둔'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었나. 그날 참석한 분 중 한 분을 지인이 만났는데 "P형 올해 설명회에 참석한 사람들끼리 모임을 하나 만들기로 했소. P형도 참여하소"하더란다. "무슨 모임?"했더니 "무슨 모임은 무슨 모임이야, 올해부터 월급이 깎이기 시작하는 사람들 모임이지"하며 설명을 해주더란다. "모임 이름은 '삭봉회'인데 삭감한다 할 때 '삭'이요, 봉급이라 할 때 '봉', 그래서 삭봉이요, 껄껄껄~."

회원들끼리 SNS 모임을 만들어 안부를 묻기도 하고, 회사 안이나 길거리에서 만나면 우스개처럼 "삭봉!" 하며 거수경례를 한다나. 얘기를 들으며 웃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지만, 가슴 한쪽에 그늘처럼 쓸쓸함이 드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도 머지않아 걷게 될 길이 아닌가.

삭봉회라…. 모임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명이다. 하지만 이름 속에 페이소스가 상당히 강하다. 쓸데없는 걱정이 생겼다. 회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너무 우울하게 생각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애환을 드러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겠지만 '우아함'은 부족하다. '삭봉'을 대신할 만한 품격 있는 이름이 없을까.

문득 옛 이야기 한 자락이 떠올랐다.

늙은 쥐가 있었다. 젊을 때는 비상한 재주로 음식을 곧잘 훔쳐 먹었지만 나이가 드니 눈이 침침해지고 몸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일하기가 쉽지 않았다. 늙은 쥐는 젊은 쥐들에게 자신만의 노하우를 전수해 준 뒤 젊은이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하지만 지식을 다 배우고 나자 젊은 쥐들은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다. 음식도 나눠 주지 않았다. 늙은 쥐는 굶기가 다반사였다.

어느 날, 아낙이 솥에다 음식을 넣고 뚜껑을 덮은 뒤 무거운 돌까지 얹어 두고 외출을 했다. 젊은 쥐들은 안달이 나 온갖 궁리를 해봤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늙은 쥐를 찾아갔다.

늙은 쥐는 괘씸했지만 방법을 알려 주었다. "솥에는 발이 세 개 달려 있으니, 그 솥발 세 개 중 하나의 아래를 열심히 파보라. 그러면 자연히 솥이 기울어지고 솥뚜껑이 벗겨질 것이다." 늙은 쥐가 시키는 대로 해보았더니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옛 책에 실려 있는 '노서(老鼠'늙은 쥐)'라는 이야기이다.

기업이나 회사도 마찬가지다. 나이 든 직원들도 있고, 젊은 사람들도 있다. 나이 든 직원들에게도 초년 시절이 있었고, 선배들에게 배우며 일을 익혔다. 나이가 들며 후배들이 생기고, 또 그들을 가르쳤다. 그게 조직이 돌아가며 유지되는 원리이다.

삭봉회의 '노장'들이 이야기 속의 '늙은 쥐'와 닮지 않았는가. 그들을 밥만 축내는 늙은이로만 생각할 것인가. 젊은이들에게 지혜를 빌려주는 늙은 쥐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그런데도 고임금을 받고 있다고 배 아파해야 하나. 지인에게 권해 드려야겠다. 삭봉회 말고 '노서회'로 하소. 훨씬 운치도 있고 자존감도 있는 것 같지 않소. 충분히 그럴 만하오.

젊은이들도 취업이 안 되어 살기 힘들다고 한숨이 넘치는 세상이다. 하지만 청춘을 바쳐 열심히 일해 왔고, 후배를 키워준 선배들에게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늦가을 젖은 낙엽 대접을 받는 노서들의 눅눅한 쥐구멍에도 따뜻한 봄볕이 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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