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人&스토리] 김성수 달성문화재단 문화정책실장

누구랑 안 친하다고 무대 못 오르는 지방 고질병 고쳐져야

김성수 달성문화재단 문화정책실장. 사진 이채근 선임기자 mincho@msnet.co.kr
김성수 달성문화재단 문화정책실장. 사진 이채근 선임기자 mincho@msnet.co.kr

대구경북 지역 대학(2'4년제) 음악'공연 관련 학과는 연간 1천 명이 넘는 전공자를 배출한다. 그러나 음악 관련 시립예술단체에서 활동하는 전문 예술인은 300명이 채 안 된다.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 저변이 확대됐다고는 하지만 무대는 여전히 좁다. 유럽'미국 등지에서 수년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음악 인재 중 꿈을 이루고 살아가는 이는 드물다. 어떤 이는 음악과는 무관한 일을 하고, 또 어떤 이는 화려한 조명과 관객의 관심 속에 재능을 펼쳐보인다. 그리고 어떤 이는 무대 바깥에서 연주자를 '지휘'한다. 대구 달성문화재단 김성수 문화정책실장도 그렇다.

◆롤러코스터 같은 8년

"대리(기사)를 하냐, 유학까지 갔다 와서…."

수화기 너머 고교 시절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 한 번도 부끄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손에 10만원을 쥘 수 있는 결혼식 축가 아르바이트는 주말에만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운전을 좋아했으니 택시운전이든 대리운전이든 가리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스스로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친구의 그 한마디는 비수가 됐다. 처음으로 부끄러웠다.

3살 난 아들을 둔 아빠는 '남자가 책임감이 없다'는 말을 듣기 싫었다. 수입이라고는 교회에서 지휘하고 받는 사례금 60만원이 전부였다. 세 사람 생활비로 턱없이 부족했다. 무대에 오르려면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카드깡'에 손을 댔다. 몇 번이고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에 들러 돌려막기를 부탁했다. 막고 막아도 연체되기 일쑤였다. 꼬박꼬박 날아든 카드명세서는 열어보기 두려웠다.

기독교 신자인 그에게 쏠쏠한 아르바이트 제안이 들어왔다. 불교합창단을 지휘해달라는 것. 차마 할 수 없었다. '유학을 가지 말 걸' '합창단에 지원할까' '나를 받아줄까?'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유학 후 돌아오면 여기저기서 반겨줄 줄 알았다. 막연한 기대도 컸다. 그런데 분위기는 변했다. 후배 중 몇몇은 "그 돈으로 사업하지 뭐하러 유학을 가느냐, 음악치료사를 하든, 오페라 무대 스태프가 되든 다른 길도 많은데…"라며 그가 생각하지도 못한 길을 택했다. 어떤 친구는 시장에서 속옷장사를 한다고 했다. 그가 아는 한 같은 학번 동기 중에 현재 무대 위에서 활동하는 이는 없다.

10개월쯤 지나서야 숨통이 트였다. 그때만 해도 유학 다녀온 이들이 대부분 솔로 가수로 활동했다. 그래도 그는 '이깐따디' 중창단으로 꾸준히 무대에 올랐다. 부지런히 움직인 그에게 여러 오페라단에서 연락이 왔다. 크고 작은 배역에 시간도,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지금처럼 오디션이 활발하지 않았어요. 계속 공연을 해야 얼굴을 알릴 수 있었어요."

목을 보호한다면서 오전에는 주로 쉬었다. 공연 준비나 연습, 개인지도, 모임 약속은 모두 오후나 밤늦게 잡혔다. 어느 공연장이든 찾아가 관장, 대표, 교수들을 만났다. 한마디로 '비볐다'. 불규칙한 생활에 계속된 모임으로 몸은 축났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보릿고개'(비수기)는 피할 수 없었다. 공연이 거의 없는 1, 2월이면 수입이 뚝 끊겼다. 생계형 가수에게 기간도, 금액도 일정하지 않은 수입은 그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나를 찾지 않으면 어쩌지?'

◆목소리가 남달랐던 덕분(?)에

그도 한때는 '누가누가 잘하나'(KBS)나 '꾀꼬리 노래동산'(MBC)에 열광하던 어린이였다. 또래 아이들이 무대에 서는 걸 보고 따라불렀다. 동요 부르기를 좋아했던 그는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한 어머니에게서 재능을 물려받은 것 같다고 했다. 위로 누나가 셋이나 있었지만, 그의 음색을 따라가지 못했다.

"남자가 성악을 해서 뭐할라꼬."

남다른 목소리를 가졌던 아들이 마뜩잖았던 아버지는 누나들에게 피아노와 무용을 시키면서도 그에게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노래를 못하는 줄 알았다.

노래를 좋아했던 소년은 고교 합창단에 들어갔다. 그의 맑고 고운 목소리는 숨겨지지 않았다. 담당 교사는 그에게 성악을 추천했다. 아버지를 반년 동안 설득한 끝에 고교 2학년이 되어서야 김완준 현 경주예술의전당 관장에게 개인지도를 받게 됐다.

89학번이 됐다. 그런데 학교는 노래만 배우는 곳이 아니었다. '군기'가 센 성악과 전통 탓에 첫 학기 내내 두들겨 맞았다. 서울에 있는 학교로 가려고 대학 입학시험을 다시 봤지만 미끄러졌다. 떠밀리다시피 입대했다. 복학생이 되니 학교생활이 한결 편했다. 과 학생회장을 맡아 이런저런 공연을 기획하기도 하고 프로그램을 짜기도 했다. 졸업을 준비하는 동기들은 교직을 이수해 음악교사가 되거나 오페라 가수가 되고자 했다. 유학을 다녀온 선배들은 일찌감치 원하는 곳에 자리 잡았다. 그들처럼 다녀오기만 하면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있고, 대학 강단에 오를 것 같은 기대에 부풀었다. 포항시립합창단에 입단해 대학원을 병행하며 유학을 준비했다.

아버지는 거듭 유학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잠시 흔들렸다. 아무리 뛰어난 오페라 가수도 1년 내내 오를 무대는 없다. 노래를 못하면, 또 신인 성악가가 치고 올라오면 밀려난다. 유학을 다녀오더라도 성악과 교수는 언감생심이었다. 아버지 말씀대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며 합창단에 계속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결론은 유학이었다. 그는 "뻔히 보이는 길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면서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다고 가보지도 않고 비관할 필요는 없었다"고 했다.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다. 생소한 이탈리아어 탓에 입학이 1년 늦어졌지만 디플로미노 시험에 합격해 피아첸차 주세페 니콜리니 국립음악원을 2년 만에 졸업했다. 학위를 받고도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콩쿠르와 합창 지휘를 하느라 2년을 더 버텼다.

"유학은 학위만 따려고 가는 게 아니잖아요. 본고장에서 오페라를 경험하고 그곳 문화를 익힐 수 있었죠."

아버지는 "그만 하고 돌아오라"고 하셨다. 5년간 매월 200만리라(유로화 통합 전 이탈리아 화폐단위. 200만리라는 당시 원화로 150만~200만원)를 받았다. 국립음악원 학비는 무료였지만, 아내와 함께 쓰는 생활비와 집세는 아버지께 의존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결국, 2003년 귀국했다.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

평생 무대 위 주인공으로 살 수 있는 성악가도 더러 있지만 적어도 그는 아니었다. 유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미래를 위해 달려온 삶에 회의가 들었다. 작품을 같이 만들었던 스태프 중 한 사람이 공연기획 쪽 일을 해보겠느냐고 했다. 귀가 솔깃했다. 얼마가 됐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가족들은 "이제 겨우 자리 잡았는데 어디를 가려느냐"고 책망했다. 도피하듯 혼자 서울로 갔다. 오케스트라를 관리하고 공연을 기획하는 일이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할 일도 아니었다.

"매일 출근하잖아요. 안정적이고, 게다가 4대 보험까지 있었으니…."

2011년 그의 길을 묵묵히 응원했던 기둥이자 바람막이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홀어머니가 계신 대구로 돌아왔다. 운 좋게 2013년 달성문화재단 채용에 합격했다. 관객이 좋아하면 그만이고, 돈이 최우선이던 이전 회사와는 달랐다. 주민과의 소통이 우선이었고, 음악'미술'문학 등 맡은 분야도 늘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몰랐던 문화예술 분야를 알아가면서 시야를 넓혔다. 그중에서도 무대시스템은 유학 경험으로 많은 도움이 됐다. 덕분에 적잖은 예산으로 '강정 현대미술제' '달성 100대 피아노' 등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같은 고민을 하겠지요. 비참한 삶까지는 아니라도, 불안감 같은 건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무대를 갈망하는 예술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 실장이었다. 어렵게 공부를 마친 예술가들이 대우받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는 서울 사람, 외국 사람이면 잘할 것이라는 '예술사대주의'를 없애고 싶다고 했다. 또 "오디션으로 기회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학연, 지연을 무시할 수 없다"며 "누구랑 친하다고 무대에 오르고, 아무리 잘해도 특정 무대에는 못 오르는 관행은 지역 예술계에 고질적인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는 예술인을 위한 지원이나 제도적 장치 중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음악이 아니지만, 일이 즐거운 것도 이 때문이다.

"어려웠던 제 경험을 교훈 삼아 예술 하나만 보고 달려온 이들이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돕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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