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태준, 문학동네(2018)
춘곤(春困)인가? 소생과 시작의 계절이 되면 왠지 따라오는 피로감도 짙어진다. 볼륨감 있는 책이 어쩐지 부담스럽다. 이럴 때는 말라깽이 시집을 한 권 들어본다. 가볍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가벼움의 무중력 상태로 이끌려 들어간다. 시인은 청량감 있는 긍정의 운을 띄운다. '시가 누군가에게 가서 질문하고 또 구하는 일이 있다면 새벽의 신성과 벽 같은 고독과 높은 기다림과 꽃의 입맞춤과 자애의 넓음과 내일의 약속을 나누는 일이 아닐까 한다.'
2018년 2월 문태준은 새 시집에 계절과 사랑과 어머니를 곱게 담아 정성스레 내어놓았다. 3년을 숙성시킨 일곱 번째 작품집이다. 그는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이래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출간했다. 이 시집들에 수록된 작품들로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애지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 현대 시단에 유의미한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금년에 나온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에는 '일륜월륜(一輪月輪)-전혁림의 그림에 부쳐'부터 '산중에 옹달샘이 하나 있어'까지 63편의 시가 분홍빛 책자 안에 석류알처럼 알알이 박혀 있다. 신작을 통해 만나본 그의 시 세계는 애잔하고 포근하고 아름답다.
오늘 감꽃 필 때 만났으니
감꽃 질 때 다시 만나요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어요
중에서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재회의 사이에 감꽃이 마르는 반나절은 마애불이 닳아 없어질 억겁의 시간과 이어지고 소통한다. 작가는 모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관계에 대한 사유, 존재와 존재 사이의 주고받음에 대한 생각을 넘어 너와 나란 분별, 경계를 무너뜨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념즉시무량겁이라 했던가. 찰나의 생각이 영원과 하나가 되는 그사이에 무수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우리는 기가 막히는 삶의 연속에서 기나긴 기다림을 무료한 일상으로 바꾸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만나기를 기약한다. '앓는 나를 들쳐 업고 소낙비처럼 뛰던'(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듯이, 마주 보고 있어도 그리운 연인을 기다리듯이, 혹은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날 잃어버린 자식을 기다리듯이 그렇게 우리는 잔잔한 시간 사이를 유영한다.
오솔길을 걸어가 끝에서 보았네
조그마한 샘이 있고 샘물이 두근거리며 계속 솟아나오는 것을
뒤섞이는 수풀 속에서도 이 오솔길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네
중에서
애상(哀想)이 아름다운 것은 슬픔 속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오솔길 끝에서 만나는 샘물처럼 우리의 삶을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너와 나의 분별을 허물고 생사의 경계를 무너뜨릴 때 자연은 우주적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그 속에서 끝없이 사모함으로 모든 것을 마음에 모실 수 있게 된다. 사모의 정이 있는 누구에게나 이 가벼운 우주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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