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 대구은행 정기주주총회장. 당시 강경헌 대구은행 전무는 편안한 기색으로 주총에 참석했다.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 이상경 은행장으로부터 별다른 언질을 받지 않은 터였다. 그 경우 대개 연임이 보장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은행장 입에서 나온 발표는 뜻밖에도 전무 퇴임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강 전무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자리에는 경황 중에 챙기지 못한 그의 안경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실무형인 이 은행장과 외향형인 강 전무 사이는 원만치 않았다. 하지만 은행 안팎에서는 강 전무가 연임에 성공하고 1~2년 뒤 은행장직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대세였다. 은행장이 전무를 전격적으로 내치면서 대구은행은 후폭풍에 휘말렸다. 노동조합은 은행장의 독선 인사 규탄 서명 운동을 벌였다. 대구은행 내 경북고(이상경)와 대구상고(강경헌) 세력 간의 갈등이 터졌다는 언론보도도 잇따랐다.
주총 직후 대통령(노태우)의 대구 방문이 임박한 상황에서 은행감독원과 지역사회는 갈등 확산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이 은행장이 전격 사퇴하고 외환은행 출신인 홍희흠 씨를 제6대 은행장으로 영입하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했다. 서열 1'2위 간 권력 다툼의 결말은 양패구상(兩敗俱傷'쌍방이 다 함께 패하고 상처를 입음)이었다.
지금 DGB금융지주'대구은행(이하 DGB)에서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일들을 보면서 1992년 일을 떠올린다. 여러 비리 의혹이 터져 나오면서 박인규 회장 겸 은행장이 물러났는데 이미 그전부터 내부 권력 암투설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은행권 안팎에서는 DGB의 차기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노리고 박근혜 정부 당시 권력 실세에 줄을 댄 인사가 있다는 설마저 나돌았다.
실제로 박 전 DGB 회장은 사정기관의 수사가 은행 내부 투서에서 비롯됐다는 의심 아래 임원들에게 휴대폰 통화 내역 제출을 요구하는 등 제보자 색출에 나섰다. 올 초 인사 때 임원들을 대거 퇴진시키는 강수도 뒀다. 박 전 회장은 이를 통해 친정 체제를 구축하려 했지만 결과는 1992년과 닮은꼴이 됐다. 경쟁자를 내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스스로도 여론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DGB 임원 인사에 정치권 입김이 작용한다는 루머는 진위를 판별하기 어렵고 허황한 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팔성 전 우리금융그룹 회장이 이명박 전 대통령 일가에 연임 보장을 대가로 20억여원을 건넨 혐의로 수사를 받는 것을 보면 DGB 임원 인사에 정치권 입김이 전혀 없었으리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박 전 회장 역시 고향이 경산이라는 이유로 친박 실세 정치인과의 친분설이 나돌았고, 그전의 몇몇 은행장에게도 의심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DGB에서는 낙하산 외부 인사가 날아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은행장이 임기 중 용퇴하는 관례가 많았는데, 미담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권력 암투 때문에 밀려나는 경우도 있었다는 후문이 있다.
이런 루머들은 사실 여부를 떠나 DGB를 독버섯처럼 갉아먹는다. 실력이 아니라 외부 도움을 받아 승승장구했다고 의심받는 임원들이 진정한 리더십을 인정받기란 어렵다. 이 틈을 타 일부 조직원들이 정권 교체기에 권력 실세에게 줄을 대려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구은행은 창립 51년 동안 꿋꿋이 성장했다. 1967년 개업식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 명의로 대구은행 1호 예금통장을 개설해주면서까지 힘을 실어주었다. 자본금 1억5천만원으로 소박하게 시작한 DGB는 현재 자본금 8천500억원에 이르는 금융그룹으로 컸다. 구성원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지역민들의 성원이 절대적이었다.
지배주주가 없다고 해서 DGB에 주인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DGB의 주인은 지역민이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는 착각에 빠져 정치권에 줄 대는 인사가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후임 CEO 선임 절차가 예정돼 있다.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실력과 명망을 갖춘 인사의 선임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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